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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un 06. 2021

신들의 황혼

실처럼 이어진 연상들

신들에게도 과연 운명이 있는 것일까요? 

한번 시작된 <니벨룽겐의 반지> 듣기가 끝낼 생각조차 들지 않게 저를 계속 잡아 매고 있습니다 

같은 실황 연주인데도 아주 대조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뵘의 60년대 바이로이트 공연 녹음과 (66년 67년 공연에서 각각 가져왔는데 <신들의 황혼>은 제 기억으론 67년 공연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 틸레만의 녹음을 계속 번갈아 가며 듣다 보니 이젠 가만있을 때도 귀속에 음악이 남아서 맴맴 돌고 있네요.




지난 글 : https://brunch.co.kr/@milanku205/908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에서는 1막의 앞에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서곡 정도가 아니라 전체 서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은 긴 장면이 등장합니다. 거의 독립된 막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사이즈와 사건들을 담고 있는데요


서막의 첫 장면에서는 신과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노른들이 운명의 실을 짜내려 가며 앞으로 등장할 신들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진행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3명의 마녀가 등장해서 미래에 대한 암시를 던지는 장면들이 생각나네요, 3명의 마녀가 끓는 솥을 앞에 두고 예언을 했다면 바그너의 스토리에서는 끊임없이 뽑아져 나오며 연결되어 나가는 끈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끈이 내포하는 의미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연결된 우리의 운명이 갖는 구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면,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작가가 배꼽을 통해 인류가 짊어진 운명과 그에 대한 남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들과도 일맥상통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 중에서


"배꼽이 없는 여자의 전형이 너에게는 천사지 -중략-

최초의 탯줄은 바로 그녀의 음부, 배꼽 없는 여자의 음부에서 나온 거야, 성경에 나온 말대로라면 거기서 다른 줄들도 나왔어, 줄 끄트머리마다 작은 남자나 여자를 매달고서. -중략-

이 모든 게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돼서 거대한 나무, 무한히 많은 몸들로 이루어진 나무, 가지가 하늘에 닿는 나무로 변했단다"


(밀란 쿤데라가 그려내는 역사와 지성에 대한 다양한 알레고리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만약 바그너가 <맥베스>의 구조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서 운명의 실 장면을 삽입했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3명의 예언자들은 <신들의 황혼>에 등장하는 노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3명의 예언자가 물 위에 떠 있는 장면을 보면, <니벨룽겐의 반지> 첫 번째 작품인 <라인의 황금>에 등장하는 3명의 '라인의 처녀' 이미지와 <신들의 황혼>에 등장하는 3명의 노른들이 하나로 합쳐진 느낌이 드는데


바그너가 창조해 낸 라이트 모티브란 음악적 기법처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감독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속 이미지에 라이트 모티브란 기법을 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엉뚱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여자의 몸에서 이어지는 끈들을 통해 시간을 넘나들며 연결된 것이라면 결국 이 운명을 끝내는 것도 여성의 몫이어야 하는 것일까요?


늘 그렇듯이 바그너는 여성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추구해 나가는데, 최고의 전쟁영웅인 발퀴레의 리더였던 브륀힐데가 사랑을 통해 무장해제되고 어느 순간 사랑하는 남성의 승리와 복귀만을 기다리는 평범한 여성이 되었다가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이 불타는 순간 운명의 반지와 함께 뛰어들며 스스로를 희생시켜 세상의 질서를 회복시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eTWkSmbAG4


장장 17시간이 넘는 거대한 음악극의 피날레를 통해 바그너는 전체 서사를 하나하나의 라이트 모티브를 통해 다시 한번 재구성해내며 웅장한 막을 내립니다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 중에서


"내가 꿈꿨던 건 인류 역사의 종말이 아니야 -중략-

내가 원했던 건 인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중략-

나는 최초의 여자의 배꼽 없는 작은 배에 뿌리내린 그 나무의 전적인 소멸을 원한 거야 -중략-

그 참담한 성교가 우리에게 어떤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할지 몰랐던 그 어리석은 여자, 쾌락을 가져다주지도 못했을 게 틀림없는 그 성교가 .....,"


함께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어느 한 명에게만 더없이 가혹하게 내려지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밀란 쿤데라와 바그너의 대척점에 서있는 생각과 그 해결책이 다시 한번 저를 음악과 책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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