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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May 23. 2021

바그너, 새로운 질서

코로나로 인해 세상에 많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지 벌써 1년 반이 다 돼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제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많았지만 이젠 변화를 통해 새로이 등장한 현재의 모습이

미래의 표준이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들이 많습니다.


이런 새로운 질서들을 생각하다 보니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가 떠오릅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닌가 봅니다. 영국에서는 지난 2월 BBC 라디오 3을 통해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가장 최근 반지 전곡 사이클 공연 (2018년 가을 시즌)이 전파를 탔었는데요, 



<즐거운 지식>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니체보다 약 10여 년 전에 <신들의 황혼>을 완성시킨 바그너..

영웅에 의해 무너지고 끝내 불타오른 신들의 세계를 통해 바그너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이런저런 궁금증으로 사이클 중에서도 <신들의 황혼>을 요즘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전작인 <지크프리트>와 연결되는 무대 위에 3명의 노른 (운명의 여신)이 등장해서 실을 짜며 세상의 변화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점치고 있습니다.



이 3명의 여신이 물러나고 관현악 간주곡이 연주되는 동안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는 영웅 지크프리트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 브륀힐데가 등장하는데, 브륀힐데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Zu neuen Taten, teurer Helde" 

새로운 행함을 향해 나의 영웅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twJok3v9OSY


바그너의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항상 결정적인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고, 이 거대한 서사극 <니벨룽겐의 반지>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유럽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암시하는 듯 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에서 여자 주인공의 첫 번째 대사가 바로 사랑하는 연인을 자신의 곁에 두지 않겠다는, 당신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새로운 행함을 향해"로 시작한다는 것에서 바그너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아담과 이브의 사랑의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다가가는데 브륀힐데가 부르는 대목에서  Gedenken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들을 때는 미처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번에는 바그네리안 소프라노가 거칠게 반복하는 Gedenken이라는 발음이 귀를 자극합니다.


영어로 번역된 리브레토에서는 Think로 표현을 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생각하다, 기억하다, 기념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더군요. 




새로운 세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의 영웅에게 지혜가 되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는 과연 무엇을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념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음악은 신들의 세계를 불타오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작임에도 4부작 사이클을 다 담은 음반들이 꽤 많이 출시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별도의 스튜디오 레코딩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니 오히려 실황 음반도 꽤 많이 나와 있습니다.


사실 전체 사이클을 추천하는 것과 각 작품별로 추천하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솔티의 녹음에 자극을 받은 카라얀의 DG 레코딩은 전체적인 완성도에선 많은 추천을 받지 못하지만 <발퀴레>만 따로 놓고 본다면 꽤 훌륭합니다. 사이먼 래틀이 베를린 필과 만들어 낸 <발퀴레>도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감흥에 곧바로 들어본 <라인의 황금>에서는 많이 실망했던 적이 있었죠.


<신들의 황혼>은 푸르트벵글러의 53년 실황 녹음, 솔티의 스튜디오 레코딩 그리고 바렌보임의 바이로이트 실황등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레바인과 하이팅크의 녹음은 바그너의 선동적이고 거대한 규모를 다 드러내지 못한 느낌이며 전체 사이클로는 가장 편애(?)하는 뵘의 실황도 <신들의 황혼>에서는 실황의 특성 때문인지 다른 작품들과 달리 부분적인 정교함이 떨어지고 좀 거친 느낌을 주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클래식 전문인 IDAGIO에서 APPLE로 막 옮기고 난 탓에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솔티의 레코딩만 계속 듣고 있는데, 녹음이 이루어졌던 시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극을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기술적인 성취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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