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을 뒤늦게 봤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로 뒤늦게 장편영화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이 역시나 이번 편도 연출을 맡았더군요.
조앤 롤링을 좋아하는 편이라 (해리 포터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이번 영화도 흥미진진하게 보기 시작했는데,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터라 영화만 보기엔 몰입감도 부족하고 조앤 롤링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세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시선 (해리포터에서 많이 등장하던)도 느끼기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마법 장면을 연출한 효과들이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느낌이 없어서 영화 자체로는 크게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하지만 영화 속 한 장면이 유독 눈길을 끌어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법사와 일반인 사이의 사랑을 금지하는 마법 사회의 관습과 체재에 실망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며 파리로 언니를 만나러 간 퀴니는 사람들(심지어 마법사들까지도)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습니다. 파리의 어느 골목에 서 있는 그녀의 귀에 갑자기 사랑하는 제이콥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파리에는 왔지만 새로운 세상에 홀로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려온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 그토록 그리던 바로 그 소리가 들리자, 얼른 소리가 들리는 (제이콥의 존재가 느껴지는 쪽으로) 눈과 귀를 향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소리가 들려오던 골목에서 사람들이 한 명씩 우산을 펴 들고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도저히 자신의 사랑이 부르는 소리를 놓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얼른 제이콥이 느껴지는 쪽으로 향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비 내리는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우산을 펴 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도저히 자신의 사랑이 부르는 소리를 따라갈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게 되죠.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우산이란 소재가 암시하는 익명성과 미스터리함에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익명의 댓글들, 그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면모가 영화 속 우산을 든 사람들로 형상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우산을 펴는 순간 아무도 구분할 수 없는 영화의 장면처럼 말이죠
그리곤 곧바로 또 다른 영화나 기타 예술에 등장하던 우산의 이미지들 몇 가지가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이번 영화가 암시하는 것 같은 대중, 익명, 군중 이런 느낌을 동일하게 전달하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우산 장면이 있었죠
"Wait.... wait" 톰 크루즈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대던 아가사를 불안하고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모든 관객은 쇼핑몰 밖으로 나온 그들 앞에 내리는 비를 보며 눈치를 채기 시작했죠. 곧 우산을 펴 들고 자연스럽게 대중 속으로 사라져 간 그들... 똑같은 검정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군중들 속에선 더 이상 아무도 이들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영화는 영화 내내 모든 것이 노출된 미래사회 속의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빅 브라더스에 노출된 연약한 개인을 막아주는 신비의 무기, 바로 우산이 멋진 반전의 도구로 등장했습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 중에도 우산이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팀 버튼이 연출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첫 배트맨 시리즈에서 악당 펭귄이 우산을 들고 다녔었죠. 이런저런 무기로도 변하고, 가끔 우산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기도 했던 것 같은데요,
펭귄의 아버지가 폭풍우 속에서 돌아가시면서 펭귄의 안전이 염려된 어머니가 강제로 들고 다니게 했다는 우산은 악당 펭귄을 보호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그가 숨을 수 있는 안식처의 의미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최근 영화 중에 우산이 무기로 변하던 장면이 유명한 영화로는 <킹스맨>이 있었죠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는 우산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기능이 확장되면서 영화 속에서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서 나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빗방울을 막는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산은 동시에 비가 내리고 흐리고 축축한 불쾌하고 우울한 감정도 연상시키는데, 블레이드 러너의 암울한 미래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견하는 우산이 이런 느낌을 정확하게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스타워즈 광선검의 영향인지 우산 지지대가 네온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도구가 이처럼 독특하게 다양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지 않은가요?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막으로 사용되던 우산이 그 보호막 뒤에 숨겨진 개인의 정체성을 지켜준다는 기능에서 조금 더 나아가 각 개인의 익명성을 보장해준다는 발상과 그런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형상화해내는 예술가들의 창의력이 참 부럽습니다.
이렇게 알고 나니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세상엔 아직도 많은 것들이 너무도 당연한 듯 보여서 오히려 우리의 시선 밖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다시금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