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UX가 만능은 아닙니다, 조직에선 더더욱
어느 기업에서 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비즈니스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우리가 시장에 내놔야 하는 어느 정도의 스케줄은 정해져 있고, 이를 우리는 데드라인으로 부릅니다. 기본 요건과 방향성은 수립되고 초기 기획은 완료되었지만 UX 파트에서 여러 제안사항으로 깊이 있게 고민을 하느라 일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개발팀은 백엔드 설계는 어느 정도 해놓은 상태이지만 UX 파트의 변동 범위에 따라 방향성이 달라질 여지도 있기 때문에 대기 중입니다.
이제 PM은 목이 타들어 갑니다.
스케줄 체크 때문에 UX 파트에 채근은 해보지만 UX 파트에서는 다른 부서원들은 UX에 관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업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고리타분한 부서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용자 친화적인 원대한 업적을 이룰 부서는 자신들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고민의 방향을 다른 부서에 이야기해본들 일정이나 늦추는 원인이라 타박받으니 되려 투명하게 공개하지도 않습니다.
점점 시간은 흐르고 물리적으로 수습 가능한 데드라인을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다른 부서들은 UX부서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UX부서는 올바른 일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며 날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회사 분위기는 개판이 나고 점점 서로 책잡히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입장에서 업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결국엔 이렇게 회사에선 더 이상 UX가 성장할 기회조차 깨끗이 소멸해 버리고 맙니다.
대체 왜 이지경이 난 걸까요?
서로에 대한 소통 부족? 신뢰 부족? 뭐 다 맞는 이야기지만, 저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시간의 변수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UX 부서를 타겟팅하는 소설에 억울해할지도 몰라 약간 예시를 바꿔볼게요.
일정도 중요하지만 레거시(Legacy)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확장성과 구조를 갖춘 아키텍처를 짜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한 개발팀, 하지만 비개발 파트는 그저 움직이기만 하면 되지 이게 왜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놈들에게는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러면서 일정은 늘어지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다 똑같습니다.
모든 예시에서의 공통점은 각 파트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에서는 절대 소홀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분야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 또한 공통의 문제입니다.
모든 비즈니스에는 타이밍이 존재하는데, 이를 합당하게 준수할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준수할 수 없는 데드라인을 요구하는 경영진의 문제가 가장 큰 수도 있겠지만 이건 일종의 자연재해라고 생각합시다.
자, 다시 돌아가서 UX 디자이너/설계자인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고민의 깊이는 어디까지 일까요? 사용자를 위한다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과연 좋은 서비스가 나올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민의 깊이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내에 절충안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까지 여야 합니다.
오만한 생각으로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가 사용자/고객을 몰라서 못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들지 마세요.
저는 MVP(Minimum Viable Product) 접근방법을 개인적으로는 비판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긴 합니다만, 그 안에 담긴 가치만큼은 200% 공감하는 편입니다. 고객에게 빠른 가치 테스트와 피드백으로 우리 서비스를 지속 성장시킨다는 기본 가치 말이에요.
세상에 완벽한 UX라는 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고, 트렌드도 변하며, 기술도 변합니다. 과거엔 국경과 문화의 틀 안에 갇혀서 차이로 굳어져 오던 정설들도 벽이 허물어지는가 하면 새로운 소비 형태와 가치 인식이 생겨나면서 기존과는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단 건 결국 어제의 UX와 오늘의 UX는 달라지고, 더욱 지난달의 UX와 이번 달의 UX는 또 다르게 달라져 있을 겁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민하고 나면? 그만큼 고민할 것들은 또다시 늘어납니다. 언제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면 완벽해 질까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믿고 그들의 인사이트를 끊임없이 빌리세요. 그리고 내가 옳다고, 우리 부서가 옳다는 오만에 치우쳐 혼자 깊이 있는 UX를 고민한다고 다른 조직원들을 희생시키지 마세요.
UX의 대원칙은 다양한 관점의 사용자 이해가 모여 온전히 사용자를 이해하고 그를 위한 서비스/제품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사용자는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의 아집일 뿐이지.
정신 차리세요.
지나가는 우스갯소리로, 글로벌 컨설팅 펌에서 일하는 한 친한 형님의 이야기를 끝으로 글을 마칩니다.
납기는 생명이오,
품질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언제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생명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아집으로 회사에 뿌리내리는 UX의 씨앗을 거둬버리지 마세요. 모두를 위한 시간이란 변수를 늘 고민하면서 일해보도록 하세요. 그럼 조금은 달라진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