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내 생각보다 훨씬 우수한 동료들
드물지만 가끔씩 강연을 다녀오고 나면 종종 듣는 질문 중에 하나는
우리 조직은 아무리 UX를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해요,
어떻게 해야 UX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요?
질문자의 고뇌와 시행착오들이 담긴 눈물의 질문이라고 생각은 듭니다만... 한편으로는 질문자가 일종의 계몽주의자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려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던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듭니다.
사실 이 글의 핵심 논조는 이전에 썼던 아래 글과도 약간은 비슷할 겁니다.
링크의 글은 UX 디자이너 개인의 역량 부족에서 생기는 언밸런스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번엔 약간은 시각을 비틀어 오히려 실력 있는 UX 디자이너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을 조명해 보고자 해요.
지금 바로 딱 이해가 안 되신다면 이건 독자분들에 대한 제 UX가 모자란 탓일 테고... 수습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부연설명을 붙여보겠습니다.
보통 저런 질문으로 고뇌하는 UX 디자이너들의 특징을 보면 대체로 경력이 있는 분들이며, 자기 안에 UX에 대한 어느 정도 경험을 통한 확신이 있고, 자신이 일하는 필드 안에서의 충분한 사실에 근거한 기준이 존재하곤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경험이 독이 되죠.
어떻게 보면 모순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회사에서 유행처럼 수평적 조직문화, 영어 이름, 애자일(Agile) 방법론이나 린UX(LeanUX) 프레임웍 등을 시도하는 것을 봐 왔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UX 접근 방식들이죠,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합니다.
애자일이니 린UX니 어려운 용어들은 다 제치고, 개념적으로만 이해해 봅시다.
UX를 이상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 그림의 Not like this에 보이는 것처럼 고객이 오랜 시간을 걸려서야 결과를 보고 피드백 줄 수 있는 진행방식은 큰 리스크가 있습니다. 바로 4라는 최종 프로덕트가 나오기 전에는 고객에게 어떠한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을 수 없다는 점. 그렇다는 건 결국 제작자가 고객을 이해한 대로 여러 가지 추론으로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Like this!에 나온 방식대로라면 각 단계마다 고객은 완성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해 보면서 끊임없는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제작자는 자신의 머릿속이 아닌 실제 고객의 목소리를 통해 더 완성도 높은 서비스로 차근히 발전해나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UX 방법론을 도입했다가 오히려 조직 문화가 더 악화된 경우들을 수없이 봐 왔습니다. 네X버, 카X오는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요? 과연 그 안에는 수직적인 업무 문화인 waterfall 형태의 의사결정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존재합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저는 저런 이상적인 UX업무 방식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도 합니다. 한편에서는 애자일 무용론이 올라오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한 기업, 조직에는 반드시 감당할 수준의 문화라는 게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실력과 프라이드를 겸비한 경험 많은 UX 디자이너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UX의 기준을 잣대로 들이대며 따라오지 못하는 조직을 탓하거나 원망하게 되어버리죠.
이게 과연 함께 일하는 조직원들이 무능하고 UX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겉으로 볼 때 괜찮은 기업이라고 생각할수록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일 가능성이 큽니다. 분명 이런 조직은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은 좋을 겁니다. 당연하죠, 좋은 기업이라고 부르는 곳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니 더 좋은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요.
이런 사람들이 고객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해서 UX를 제대로 실천 안 하는 걸까요? 저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각 기업마다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체로는 자신의 업무를 쳐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붙들어놓고 같이 칸반 차트 만들자, 어피니티 작업하자 이야기해봐야 귓등으로 밖에 흘릴 수가 없을 겁니다. 제 코가 석자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실력 있는 UX 디자이너는 종종 좌절하게 됩니다. "아니 이렇게 고객을 더 이해하고 만족도 높은 서비스/제픔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대체 왜 안 하는 거야? 더 잘할 수 있는데! 멍청이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권해드리고 싶어요.
우리 조직을 가만히 살펴보고
우리한테 맞는 아주 조그만 것부터 시작하세요.
사실 UX를 바라보고 업무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UX는 어디까지나 껍데기일 뿐인데 정작 이게 목적이 되어 조직원들을 고문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안 그리면 어때요? 거 까짓 거 고객 여정 지도 안 그래면 어때요? 페르소나 하나 없다고 뭐 대수입니까?
어차피 이 모든 것들은 숙련된 동료들의 머릿속에 대부분 들어 있어요. 제대로 UX를 실천할 환경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들을 믿고 자기 역할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세요.
예를 들어 내가 기획자라면 마케터에게 찾아가 고객에 대해서 스스로 조사하고 설계서 안에 내가 알고 있는 UX 방법론을 총동원해서 담아내세요. 그리고 개발자와 디자이너에게 업무 요청을 할 때, 그냥 업무 태스크만 생성해서 던지지 말고 기획 리뷰를 하면서 기획자 스스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이게 잘 되었을 때 어떤 효과들이 있을지들을 나름의 근거를 조사해서 들고 이야기해주세요. 그럼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각 분야의 지식을 활용해 어떤 보완점들이 있을지 지나가는 이야기라도 의견을 들려줄 테니까요.
그리고 내가 디자이너라면 기획서를 받아 들고 마냥 그대로 그리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내가 아는 고객의 입장이 되어 무엇이 더 좋을까? 어떤 것들을 개선하면 고객 친화적으로 바뀔까를 고민하고 그 내용을 기획자에게 제안하고 물어보세요. UX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흔히 책이나 개념적으로 접할 수 있는 더블 다이아몬드 다이어그램 같은 방법론은 결국 단순한 과정일 뿐이에요. 각 과정은 동료들의 실력과 경험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UX 방법론은 결국 그 원리를 이해하고 일하는 방법 자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방법론의 각 단계의 형식적인 절차 자체를 지키지 않으면 UX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건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어 자유로운 토론 문화를 만들겠답시고 영어 이름을 전격 도입한 뒤, 서로 간의 이름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그나마 있던 위계질서도 흔들려 조직이 엉망진창이 되는 꼴과 같은 거죠.
결국엔 이러한 방법이 필요한 이유와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우리 조직이 가진 환경에서 가능한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 또한 UX 디자이너들의 역할입니다. 다른 동료들을 가르치려 들지 마세요. 절대 형식에 얽매이지 마세요. 내 업무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고 도움을 구하세요. 그리고 그 작은 도전들에 공감하며 더 과감한 방법론들을 도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겁니다.
왜냐하면 그 화려했던 애자일 조차도 이제는 죽었다고 선언한 세상이니까요.
cf. 애자일은 죽었다의 논조 역시, 애자일의 방법론에 얽매여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들을 경계하고 그 근본을 이해하고 실천하라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