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의 미완성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by 밀밭여우

“결국 모든 것이 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을 하나하나 소화해 왔다는 것뿐, 다른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기교만으로 종전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292)


이 글은 아내 유키코와 이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전,하지메가 가족과 지내면서 생각한 점이다.

그가 왜 이혼을 결심했고 현재 왜 실행을 망설이고 있는지 그 사연은 이렇다.


우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는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

소설 속 주인공을 보고 이런 xx놈이 있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언짢다.


그러면서도 그의 소설을 자꾸 읽게 되는 이유는 뭘까?

김영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잘 쓴 소설이어서가 아니라 - 물론 잘 쓰기도 했지만 -

아주 이상하게 썼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아주 많이 동의한다.

이상하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이끌며 자꾸 다음 이야기, 또 다른 이야기를 찾게 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모험을 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면서 다른 세상을 간접경험하기에 때론 어디 먼나라에 여행을 다녀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쨋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뭔가 있을 것 같은 묵직한 제목을 비웃기라도 하듯

초딩 시절의 여자 친구를 못 잊어하는 찌질한 한 남자의 로맨스 소설이다.


장인의 도움으로 재즈 카페를 열었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어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남자 '하지메'는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 유키코와 토끼같은 딸과 함께 아무런 걱정없이 잘 살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일 없이...너무 순탄하고 행복한 시간이 길면 인간은 살짝 지루해지기 마련인…가?!

복에 겨운 소리라고는 하지만 그게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득 문득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떠올리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첫사랑 시마모토가 자신의 재즈 카페를 찾아 왔다.

그리고 시작된 로맨스는 당연히 갈등을 불러온다.


하지메의 아내 유키코는 그동안 간간이 있었던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눈 감아줬다.

잠시 잠깐의 스치는 바람은 남편의 스트레스 해소법 정도로 너그럽게 이해해줬다.

하지만 이번만은 뭔가 다르다는 촉이 왔다.

그만큼 하지메의 불안정한 마음이 진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육체적 외도가 아니라 하지메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정신적으로 골깊은 바람이 불었다.

게다가 겪어보니 시마모토는 밀당의 여왕이 아닌가.

초딩 시절의 그 설레임이 하지메의 모든 것을 마비시키고 오직 시마모토와 그 당시 이루지 못했던 첫사랑의 아쉬움만이 그를 지배했다.


급기야 몹시도 사랑하는 처자식과 풍요로운 경제적 안정까지도 다 던져버릴 결심까지 한다.

그러니 내 입에서 xx놈 소리가 절로 나오지…ㅉ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지막 실행을 앞두고 시마모토가 끝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역시 밀당의 여왕답다.

그동안에도 툭하면 나타났다 홀연히 몇 달씩 모습을 감추곤 했기에 하지메의 애간장을 녹였던 시마모토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지메를 사랑하고 첫사랑의 기억을 퇴색시키지 않은 채 보존하고 싶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

알았지? 시마모토!

그녀가 알더라도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못알아 듣고 또 딴 짓하면 어짜피 끝장이지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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