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비극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비극의 원조를 찾고 싶어 졌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비극을 생각하다 보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있었다. 사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주신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서 내용은 알고 있지만, 동화 버전으로 만족하고 싶진 않았다.
오이디푸스는 고대 희랍(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흔히 정작 본 이야기보다는 그보다 더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통해서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재수 없게도 신의 저주를 안고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피해가려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의 예언을 100% 적중시키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도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과 어머니와 결혼하고 자식도 낳는 근친상간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뤄지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안타깝고 충격적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원래 신화 속 이야기 중 오이디푸스가 자기 삶을 둘러싼 진실을 깨닫는 부분만을 다룬다. 도시에 끊임없이 재난이 닥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추리소설과 비슷하다. 그래서 장소 변경도 거의 없고, 전후 사정은 인물들의 대사나 코로스의 설명에 의해 언급될 뿐이다. 다루는 부분이 좁아진 덕분에 한 사건과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들어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스핑크스와의 대결은 없다. 어렸을 때 봤던 책에서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딸과 함께 떠돌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스스로 몸을 뜯어먹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사실 이 장면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이 작품은 눈을 찌르고 떠나면서 코로스가 마무리한다.(그 당시 무대 위에서는 끔찍하고 폭력적인 장면은 연기되지 않았다고...)
또 다른 특징은 희곡작품이라 대사만 나열되어있다. 소설과는 다르게 부가적인 설명이 없다. 인물의 말을 통해서 그 인물이 처한 상황과 심리와 흐름을 생각해야 하고 그 시점과 관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더 인물의 감정에 이입됐다.
특히 거대하면서 불편하고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앞에 둔 오이디푸스의 갈등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나도 다시 긴장하게 했다. 무거운 사실을 마주할 그를 말리고 싶으면서도 마주했을 때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모순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처럼 불편한 진실을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나도 듣기 무서운 진실 앞에 이르렀다. 그래도 들어야 한다.
그는 결국 무시무시한 진실을 확인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에 굴복한 비극적인 인물로 볼 수 있지만, 감당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서도 직접 대면하고자 하는 용기가 다시 보였다. 사실, 진실을 외면한 채 왕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결과가 불행하더라도 진실 앞에서 당당하길 선택했고, 그가 했던 말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한글을 읽고 있지만, 외국어를 해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번역본이었다. 원래 고대 희랍 비극은 자연스러운 대사보다는 시나 노래에 가깝다. 그래서 어순이나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져 일상어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가독성이 떨어진다. 이런 글이 뭐가 재미있다고 그 시대 사람들이 열광했고, 학자들이 매달리는가 하는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내가 구입한 것은 민음사에서 출판한 번역본이다. 전문 번역가가 아닌 철학을 전공하신 학자분이 작업하셨다. 그래서 그런가, 서문에서부터 번역의 방향을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살리는데 중점을 뒀다고 밝힌다. 매끄러운 읽기를 위해 이것저것 바꾸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대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한국인 번역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대상을 일반 대중들이 아닌 진지하게 이 작품을 읽어보려는 독자로 설정한 것 같다.
이렇게 명확한 번역의 방향과 목적과 이유를 읽고 나니 마음의 준비도 되었고 그 주관이 멋(?) 있었다. 막상 본문을 읽기 시작할 때는 그 딱딱하고 낯선 문체가 거슬리지 않았다. 엄격한 기준으로 말투와 어휘까지 그대로 살리려 했기 때문에, 고대 희랍어를 모르는 나지만 괜히 원문을 해석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어 작품을 더 음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문에서 명칭과 발음 표기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는데 꽤 유익했다. 왜 ‘그리스’라는 표현 대신 ‘희랍’이라는 표현을 쓰는지(그리스라는 표현은 영어고, 그것도 라틴어의 ‘그라이키아’에서 유래한 것.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헬라스’라고 지칭했으며 이 말이 한자어로 옮기는 와중에 ‘희랍’이 되었음), ‘디오니소스’를 왜 ‘디오니소스’라고 표기했는지 등은 생각지 못한 소득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좋든 싫든 희곡작품들을 몇 개 접했다. 그래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또 정말 조악하긴 했지만 학생 연극 연출을 해봤던 경험도 읽는 재미를 느끼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극 전체의 기승전결도 좋지만 각 대사의 흐름도 생각하고, 무대에 올려졌을 때 디테일을 생각하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새삼 지금부터 2000년 하고도 훨씬 전의 사람들이 연극을 즐겼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지금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구성과 전개는 더 놀랍다. 그 긴 세월을 넘어서 통하는 이야기라니... 그만큼 공감을 얻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인간의 심리를 잘 꿰뚫어 본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작품이 있고 옛날에 이런 작가가 있었을까!’하고 생각할게 아니다. 그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연극과 뮤지컬, 영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당시 연극은 지금처럼 배우의 연기보다는 줄거리와 대사에 더 중점이 있었고 그것이 관전 포인트였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설을 조금 더 호소력을 짙게 하기 위해서 스토리 텔링을 첨가하면서 발달한 장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때는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한 때다. 돌이나 나무 등에 지식이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을진 몰라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욕구와 그걸 해소하려는 방안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연극과 같은 문화생활을 개발할 정도로 상당했을 그때 문화 수준과 의식이 또 놀랍다.
책에는 ‘오이디푸스 왕’ 외에도 ‘안티고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 편씩 음미하면서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