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을 기억하게 한 '한 남자'
It is not an idea that I miss.
It is a man.
A man that made me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A man that I would never forget.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한 남자다.
내가 11월 5일을 기억하게 만든 한 남자.
내가 절대로 잊지 않을 한 남자.
- 오프닝 中 -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보고 5번은 넘게 본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러브 액츄얼리'를 챙겨보듯이 11월 5일이 되면 이 영화를 챙겨봤다. 거기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경쾌하게 폭발하는 마지막 장면만 말하자면 정말 틈만 나면 봤다. 하지만 뭘 모를 때 봤고(물론 지금도 뭘 안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줄거리만 핥는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 본다면 또 다르게 영화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또 봤다.
제목부터 다르게 다가왔다. 승리의 V가 아닌 피의 복수를 위한 V. 제목을 이렇게 곱씹어보니 그동안 이 영화를 '자유에 대한 한 영웅의 뜨겁고 숭고한 메시지 그리고 승리'로만 바라본 것 같다. 줄거리에 맞춰보면 영화 제목은 'V for Victory'가 어울리는데 Vendetta라니(사실 Victory는 촌스럽긴 하다).. 괜히 여기에 얽힌 사연을 살펴보고 싶게 한다.
영화를 그가 실행한 '대의(?)'로만 기억하기엔 그의 개인적인 과거와 운명은 참 가혹하고 안타깝다. 원인도 모른 채 끌려와서는 정부의 실험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고 폭발로 인해 자신의 본모습도 사라졌다.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도 그는 우울증에 걸려 자기 파괴적인 삶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복수를 통해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V는 꽤 독특한 캐릭터다. 주인공이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름도 고향도 심지어 얼굴도 모른다.(얼굴을 감추는 배트맨과 스파이더맨도 영화를 보는 우린 원래 모습을 안다.) 가면으로 알 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의 정체를 가면으로 가렸지만, 또 그 가면으로 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흐려지고, 화상을 입어 예전의 본모습까지 잃어버리면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아무도 그가 누구고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을 쓰면서 말 그대로 상징적인 존재, '자유(혹은 투쟁)라는 관념의 형상체'가 되었다. 왠지 이비가 V에게 한 다음 대사는 자유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생각과 비슷하다.
How you can be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that has ever happened to me, and yet I know almost nothing about you.
당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한 명인데,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어요.
- 이비의 대사 中 -
하지만 이렇게 자유를 나타내는 가면 뒤에 되갚아야 할 지울 수 없는 흉터와 실험에 대한 끔찍한 기억들이 남아있었다. 그런 그를 단순히 '증오와 복수의 화신'이 아닌 '자유의 투사'로 태어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비의 정신개조(?)를 위해서 쓰였던 '발레리의 편지'다.
(...)
An inch. It is small and it is fragile, but it's the only thing in the world worth having. We must never lost it or give it away. We must never let them take it away.
(...)
작고 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갖고 있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부분. 그걸 절대 잃어버리거나, 팔거나, 줘서는 안 돼요. 절대 그들이 빼앗아 가게 두면 안 돼요.
끔찍한 외모와 기억과 감정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그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되찾아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해 준 그 편지. 비록 권력에 눈먼 놈들이 만들어낸 '괴물'이 되었지만, 그 한 가지만 있으면 자신도 살아야 할 목적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복수의 또 다른 목적을 시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것으로 한다면 자신의 비참한 운명이 조금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을까. 원래 복수란 대게 허무함만 남거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되거나, 새로운 복수를 낳을 뿐이다. 그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벽하면서도 통쾌한 복수 그리고 해피엔딩을 계획했다.
그가 혼자 지내는 공간에 따로 발레리를 기리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V는 자신의 할 일을 깨닫게 해 주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은 발레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을 지도..
자신도 같이 화약과 함께 폭발하면서, V는 복수를 마무리한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 서곡'에 맞춰 터지는 폭파씬은 어쩐지 축제를 연상시켰다. 그는 사적일 수 있는 복수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실 모두 정부가 행한 압제의 피해자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고 모두 그와 같은 가면을 쓰고 같은 목표를 향하도록 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들여 혼자서 준비했으며 충분히 혼자 끝낼 수 있었지만, 모두가 참여하게 했다.
불꽃놀이를 감상하면서 하나 둘 가면을 벗으며 군중들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같은 목표 같은 얼굴 아래 같이 행동했지만, 어쨌든 각각의 개인들이 모여서 한 것이다. 그들도 함께했음을 나타내고 기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얼굴들 사이에 이미 줄거리상 죽었던 인물들도 나온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같은 목적 아래 많든 적든 일조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도 빼놓을 순 없다. 특히 발레리 같은 경우에는.
No one will ever forget that night,
and what it meant for this country.
But I will never forget the man,
and what he meant to me.
아무도 그날 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 이비의 마지막 대사 中 -
대학생 때 '근대 영미시' 시간에 윌리엄 워즈워스의 'The Ruined Cottage'라는 작품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이 하신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휩쓸려 잊힌 개인'이라는 말이 당시 나에게 괜히 크게 와 닿았고, 지금도 그 말은 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괜히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보다 거기 얽힌 개인들의 사연과 심리에 관심이 많을 때가 있다.
'브이 포 벤데타'를 다시 보며, 제목에서 V라는 인물의 사연을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Remember Remember...'로 시작하고 V를 기억하며 마무리하는 이비의 내레이션을 보고 그동안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보면서 그냥 지나쳤던 인물들을 조금 더 떠올리고 싶어 졌다. V를 기억하는 이비의 해설, 발레리를 기억하는 V의 추모공간,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기억하려는 엔딩 등 영화는 충분히 그 기억의 요소들을 보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