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휩쓸린 개인의 삶
‘칼의 노래’를 참 재밌게 읽어서 나오자마자 바로 구매한 책이다. 김훈의 소설은 그 특유의 무심한 듯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문체가 있다. 바로 곁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묘사하지만 그에 과하게 몰입하는 것도 아니고 관찰자 입장에서 주변 상황이나 그 모습을 충실히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느끼는데 필요한 부분만 남겨놔서 말라비틀어질 것 같다. 그래서 더 예리하게 감정을 파고드는 느낌이랄까.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콕콕 찌를 것이고 젖어있는 사람은 그 건조함에 따가워 깜짝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마동수의 죽는 모습은 그의 묘사가 무자비하게 느껴져 그 무뚝뚝함에 읽기 힘들었다.
집에 김훈의 ‘강산무진’이라는 단편 소설집이 있다. 어릴 때 읽어서 크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책에 있던 이야기들은 정말 힘이 빠지는 것들이었다. 한결같이 건조한 문체에 인물들도 무덤덤하고 활력이 없었다. 그들은 인생을 ‘그러려니…’하고 질질 끌고 가는 듯했다. 이 책도 비슷하다.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마동수’로부터 시작되어 장남인 ‘마장세’와 차남인 ‘마차세’ 형제까지 이어지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 시대부터 6.25, 베트남 전쟁을 지나 1980년대까지다. 말 그대로 한국 근현대사 격변의 시기다. 그 무대는 영화 ‘국제시장’과 비슷한데 분위기는 그와 달리 참 침침하고 가라앉아 있다.
마동수, 마장세, 마차세. 이 세 부자는 정말 딱히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들 어떤 특출 난 면도 원대한 꿈도 없다. 특별한 게 있다면 본의 아니게 태어나고 보니 어떤 운명의 사슬에 묶여서, 덫에 걸려서, 날 때부터 짊어진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그들의 삶은 참 고달프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 이들 부자의 삶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래서 운명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어라고 생각한다. 이들 세부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 운명을 대한다. 마동수는 운명의 사슬에 묶여있음을 깨닫지만 그곳에 발붙이지 못하고 헬륨 풍선처럼 붕 떠있는 인물이라면 마장세는 그 운명에 공포를 느끼고 끊고 벗어나려는 인물이다. 마차세는 그 모든 것을 내면화하고 체념한 채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동수는 소설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인지하는 인물인데, 상해에서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느낀다.
그 소리는 자음이 없이 모음만으로 울리는 듯싶었다. 소리가 헤어날 수 없는 주술이 되어서 사람을 결박하는 힘을 마동수는 느꼈다. 그 주술의 힘은 아버지, 어머니의 'ㅓ' 모음과 'ㅣ' 모음 속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이 주술의 사슬은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모음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마동수는 알지 못했다.
p.76
1979년 69세의 나이로 죽은 마동수는 태어났을 때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태였다. 그때 그는 ‘우리나라’라는 개념을 잘 몰랐을 것이고 마음 놓고 살수 없었으니 ‘고향’이라는 말도 의미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까지 가서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문득 자신이 왔던 곳과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고 그것이 자신의 뒤를 계속 따라다닐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정을 붙였던 곳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삶 어디에도 발 디디지 못하고 붕 떠버린 인생,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비틀거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아편에서 깨어나는 통증 속에서,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인지를 마동수는 생각했다. 땅 위의 어느 곳도 고향은 아니라는 걸 마동수는 상해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이끌림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 105
상해에서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확실치 않았지만 그리워했던 만큼 버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가, 여기가 거기인가, 여기가 거기로구나
p.116
마동수가 몇 개월 동안 무소식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룻밤 자고 또 사라지고, 아무리 집을 옮겨도 어떻게든 알아내서 집으로 돌아오는 행동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마동수는 이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면, 마장세는 그 운명을 덫으로 여겨 벗어나려고 한 인물이다. 베트남에서 부상당한 김정팔이 부대로 복귀하는데 짐이 되자 사살해버리고 가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장남 마장세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시작되면, 그만하라,라고 소리 지르면서 자리를 피했다. 마장세는 자신의 출생 설화도 동생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마장세는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책가방 없이 늘 밖으로 나돌았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모습과 좋지 않은 가정형편에 마장세는 그런 가족과 운명에 신물을 느꼈다.
야 나는 한국이 무서워. 한국에 가면 아버지처럼 될 거 같아. 그래서 못 가는 거야. (p.39)
누가 봐도 아버지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닮은 자신과 동생의 외모에서 운명까지 닮을까 봐 겁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얽매이거나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저항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성인이 된 후 그의 행보를 보면 그리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았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국제적인 사기를 쳐 그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그렇게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도 운명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난 뒤, 가족의 짐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과거 월남에서의 인연이 그와 가족을 다시 연결시켜준다. 이 부분에서 참 무서울 정도로 끈질긴 운명의 힘을 느꼈다.
이와 반대로 마차세는 그 운명에 대항하려 큰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그 삶을 내면화하고 이때까지 김훈의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처럼 묵묵히 삶을 질질 끌고 간다. ‘왜 하필 나는 이런 삶을 살까’라며 불평하는 모습도 희미하다. 그저 ‘원래 이랬는걸 뭐..’라고 도망치지도 않고 무덤덤하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그렇게 애정이 있진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보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형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으니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족에 애정을 갖고 사랑해야 할 이유는 그에겐 없었다.
그래도 이 부자(父子)의 운명은 마차세의 다음 자손에까지 미치지 않을 것 같다. 마차세와 박상희 사이에서 태어난 ‘누니’는 아무도 닮지 않은 스스로가 기원인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적인 엔딩을 여기서 발견했다. 태어난 새 생명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길.
이렇게 ‘공터에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고, 그 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가 없는 짐을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갔다. 거대한 역사적 물결에 휩쓸리는 개개인은 참 작고 무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한 결코 도망쳐서 따돌릴 수 없었고 끝까지 뒤를 따라왔다. 우주적 법칙인 ‘중력’만큼이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기도 하다. 그 힘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무거웠다.
제목은 왜 ‘공터에서’라고 지었을까. 작가가 산책 중에 공터를 바라보다가 떠오른 영감으로 쓴 글이라서 그랬을까. 하긴 공터에 있는 느낌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뒤늦게 궁금해서 한 번 찾아봤는데,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공터에서'라는 제목은 공터라는 것은 주택과 주택들 사이에 있는 버려진 땅이잖아요. 아무런 역사적인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될 만한 건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 나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나는 이제 공터라고 가정을 한 거죠. 앞으로 여기다 뭘 지어야 되는 공터. 돌이켜보면 내가 이 가건물에서 산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광화문에 나갔다가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 보고 또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 안에서 살아왔구나. 또 헐리겠구나, 또 헐리겠어. 며칠 사이면 또 헐어버리고 그런 슬픔을 느꼈죠. 그 공터라는 제목은 그런 나의 비애감과 연결이 되어 있는 제목입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035207&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또 헐리겠구나 헐리겠어'라는 말이 참 씁쓸하게 한다. 개인적 취향이 '발전과 진보'에 맞춰진 나는 세상에 묵묵히 적응하려 노력한 어른들의 삶에는 참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그저 학교에서 ‘격변의 시대’로 배우고 눈에 띈 사람들만 배우고 묻힐 뻔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라 우리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쓴 글이어서 읽는 맛이 있던 책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천할만한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