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센스를 좋아하는 이유
한동안 한국 힙합을 듣지 않고 있었다. 밴드 음악에 더 빠져있기도 했지만 사실, 들어도 크게 감흥이 없기도 했다. 일일이 다 골라 들어보진 않았지만 대세라고 하는 곡들은 들어도 박자를 타면서 말을 조금 더 특이하게 빠르게 내뱉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펀치 라임이니 누구 플로우는 어떻고 하더니 확실히 각자의 색깔은 다양해진 듯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멋있고 독특할지에 대해서만 매달렸는지 그만큼 주제는 식상해지고 감동이 없었다.
자신감은 센 척이 되었고 성공은 돈자랑이 되었다. 현실은 일에 치여 놀 힘도 없는데, 얘들은 맨날 파티에 일단 놀고 보자고 난리다.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주제들이 주류가 되면서, 나는 힙합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물론 어딘가엔 내 취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을 찾아다녀야 할 의무가 내겐 없었고 그 정도 열정은 이미 식어버리고 없었다.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거 같아 씁쓸했다. 그러다 이런 나의 불감증을 치료해준 앨범이 나타났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밤에 무료하게 TV 채널을 바꾸던 중이었다. ‘힙합의 민족’이라는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젠 그냥 연예인들도 랩 하고 서로 대결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별걸 다한다면서 봤다. 그때 마침 박준면 씨가 이센스의 ‘삐끗’을 불렀고, ‘누군 용돈 받아 200만 원짜리 테이블 잡고 노는데…’부터 정신이 나간채 멍하니 보다가 소름 돋는 가사에 나는 그날 홀린 듯이 ‘The Anecdote’를 주문했다.
사족이 길었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얻은 나의 감동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앨범을 산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나는 뭐 들을지 고민될 때마다 일단 ‘The Anecdote’부터 틀고 본다. 한국 힙합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뜨린 앨범이고, 나의 불만이던 기존 힙합씬의 '살만 한 집에서 나고자란 미국 Ghetto 흉내 낸 방구석 래퍼'들을 향한 날카로운 일침이기도 한 앨범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힙합에 대해서 더 나아가 예술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감을 주는 이 앨범에 대해 이렇게 리뷰를 남기고 싶다.
‘The Anecdote’는 인간 강민호의 이야기다. 이센스는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성공한 래퍼의 삶으로 앨범을 채우며 답정너식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빵빵한 피처링으로 인맥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랩 스킬을 뽐내며 ‘자아도취’ 하지도 않았다. 대신 장래희망에 대해 고민하던 어린 시절과 밀린 방세에 막일을 뛰던 무명시절과, 비틀린 현실에 자조 섞인 웃음을 보내고 매일같이 작업실을 오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랩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이 앨범을 이루고 있다. 솔직한 삶의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제는 따지기도 민망하지만, 흔히 랩에서 기대하는 재치 있는 라임과 기가 막힌 플로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때깔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가사와 내용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 이야기 만으로도 멋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데 그런 화려함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힙합은 다른 음악에 비해 가사와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그 목적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지 ‘기술’을 뽐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알파’ 일뿐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 ‘+알파’에 집착하다간 스윙스처럼 고인 패드립을 치게 된다. 뭐, 이미 삶이 힙합인 이센스는 이제 그냥 말을 해도 랩이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예술가는 마치 다른 세상에 살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이센스는 참 현실적이다. 당장 눈앞의 생계에 허덕이고, 노가다 판을 전전하며 치킨을 ‘붐빠이’해서 겨우 시켜먹던 그는 ‘너희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영혼 없는 응원 따위 하지 않는다.
한 만큼은 돌아온다는 말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 몇 군데만 봐도 설명 안 되잖아
'삐끗' - E Sens
이센스 아니 강민호 역시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다치고,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사는 세상과 같은 세상에서 살며 그 속에서 자신의 길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렇게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성공 역시 ‘+알파’ 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런 세상 속에서 흔들리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성공이 아닐까. 이센스의 가사에는 꿈에 대한 얘기보다 현실이 더 진득하게 녹아들어 있어 가볍게 들을 수 없다.
감동을 선사하는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참 멋있다. 하지만 그전에 창작하게 된 동기와 그 동기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더 멋있다. 그 고민 속에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관이 담겨있다. 예술가는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는 과정 없이 나온 창작물은 단순한 우연이 싸지른 어쩌다 이쁘게 나온 배설물 그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걸 보고 열광하고 높게 쳐주고 싶진 않다. 이 앨범에는 그 고민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여서 맘에 들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와 ’ 결과로써 과정을 말한다’와 같이 과정을 등한시하는 말은 듣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런 생각들이 어떤 가치관도 없이 성공만을 바라보고, ‘한탕주의’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장인정신도 없는 사이비를 만든다. 이 앨범은 이런 사이비들 뿐이라고 단정지은 나에게 한방을 먹였고 또 그 사이비들에게 크게 한방 먹이는 앨범이다. 얼마 전에 출소한 이센스는 얼마나 갈고 나왔을까. 벌써 다음 앨범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