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조건
모두 어렸을 때 자기만의 영웅이 있었을 것이다. ‘다간’, ‘선가드’, ‘파워 레인저’ 등.. 위험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는 그들을 보면 어쩜 그리 멋있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을 졸라 장난감을 사고 친구들과 역할극을 하면서 놀 때면 ‘실제로 그들이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힘들고, 있을 필요도 없고, 맞서 싸울 괴물도 지구 멸망을 시키려는 거대한 악당 조직도 없다.
그래도 늘 복권 당첨을 꿈꾸듯 우리는 삶이 답답할 때면 문제를 시원하게 처리해줄 영웅을 꿈꾼다. 그래서 히어로물은 끊임없이 나오고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보고 흥행한다.
많은 작품들이 개봉했고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들도 나왔다. 현실은 찌질함의 대명사지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행동 하나로 영웅 행세를 하는 ‘킥애스’. 짝사랑에 고민하고 제대로 영웅 대접을 받지도 못하면서 남몰래 어둠의 기사를 자처하는 ‘다크 나이트’. 요즘 눈에 띄는 경향이라면 그저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영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택시운전사’.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평범한 시민들의 노력을 다룬 이 영화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그들이 해낸 일을 보면서 ‘영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영웅은 어떻게 탄생할까.
주인공 ‘김만섭’과 ‘힌츠페터’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되짚어봤다. 평범한 택시기사 만섭은 광주의 진실이고 민주주의고 관심이 없다. 오로지 딸과 먹고 살 돈이 인생의 전부다. 그래서 힌츠페터를 다시 태워 돌아가야 함에도 딸과 본인의 안전을 위해 시위대를 따라가지 않고 차를 돌린다.
반면, 힌츠페터는 도쿄에서 다른 동료에게 ‘기자가 너무 편한 곳에 있으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듯 그만의 꼿꼿한 기자 정신이 있다. 그는 광주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현장으로 향한다. 이렇게 ‘투철한 사명감’의 피터와 ‘속물적인’ 김만섭은 대립한다. 영화 초반에는 관객도 피터도 ‘미스터 킴’이 답답하고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경험할수록 만섭의 심리에 변화가 생긴다. 시민들을 향한 군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폭행과 희생자들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황태술과 구재식과의 인연은 광주의 상황을 그저 남일 같지 않게 만들었다. 딸 걱정에 혼자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와 순천에 도착했을 때, 너무 다른 평화로운 일상과 뉴스가 말하는 왜곡된 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만섭은 다른 이유로 한 번 더 차를 돌린다.
피터도 만섭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 같이 위험을 겪고 고생하고 새벽에 등 돌리고 누워 딸 얘기를 하면서 울고 있는 만섭의 뒷모습을 보면서. 만섭이 다시 차를 돌려 돌아왔을 때, 피터는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에 탄다. 각자 다른 목적을 안고 광주로 왔지만 이젠 서로의 일을 도와주면서 같이 움직인다.
처음부터 만섭과 힌츠페터가 일심동체로 움직였다면 참 진부하고 미지근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그리고 택시기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알리려는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영웅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토니 스타크나 브루스 웨인처럼 돈이 엄청 많아야 할 필요도, 헐크처럼 괴력을 소유하지 않아도 됐다. 히어로가 되기 위한 필수요소는 타인의 불행에 대한 공감과 도와줄 용기였다.
만섭과 피터 말고도 많은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사복 군인들의 추격을 따돌리는데 목숨을 걸고 도와준 택시기사들, 만섭과 피터를 위해 시간을 벌다가 죽은 구재식, 서울 번호판을 발견하고도 모른 척 넘어가 준 군인 등.. 그들의 작은 도움들이 진실을 알릴 수 있게 했다.
배트맨은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다크 나이트를 자처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작은 영웅들은 배트맨처럼 위급한 상황을 찾아 해결하진 않아도 곳곳에 숨어 있으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히든 나이트였다. 슈퍼 히어로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의와 양심이 세상을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