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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Aug 11. 201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을 만큼 허무한..

유명했지만 딱히 읽을 계획은 없던 책이었다. 하지만 얼마전에 민음사에서 밀란 쿤데라 전집을 양장본으로 새로 내놓았다. 너무 참하고 깔끔해서 ‘한 번 소장할겸 읽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중에서 제일 익숙한 제목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질렀다. 확실히 책이 이쁘니까 읽는 맛도 있었다. 책은 역시 양장본이다.


einmal ist keinmal.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가벼워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는가 보다. 뭐, 우리도 ‘인생 참 덧없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공수래 공수거’인 세상에서 뭘 가져갈수가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치열하게 살까?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 할 수 있을까?


책의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을 말한다. 영원회귀는 쉽게 말하면 ‘삶 또는 역사가 끝없이 반복된다면?’이라는 생각으로 보면 된다. 그럼 어떨까? 삶이 참 무거워 질 것이고 엄청난 책임감에 아무 것도 못할 것이고 고통도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듯 오직 한 번 뿐이다. 뒷일은 알게 뭔가. 그리고 알 수도 없다. 그렇게 짊어질 짐이 없는 우리 인생은 한 없이 가볍다.

심지어 작가는 ‘히틀러’의 사진을 보고 어린 시절을 떠올라 감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 중에 나치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한 번뿐인 세상에서는 이렇게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낳기도 한다.

소설의 배경은 1968년 체코에 있었던 ’프라하의 봄’이다. 프라하의 봄은 ‘둡체크’의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개혁을 시행하고 공산체제를 벗어나 자유민주화를 향하려는 움직임이 있던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결국엔 소련군의 불법 무력침공과 숙청으로 끝나게되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가게 되는데 이 작품에 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 이렇게 주인공 4명이 둘씩 커플로 나온다. 서로 상반되는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로 이루어진 커플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에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고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그것을 지켜가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해서 그랬냐는 듯이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을 열심히 따라가던 내가 무안할 정도로….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트럭사고로 깔려 죽는다. 한 없이 가벼운 만남과 육체적인 관능만을 추구하던 토마시는 무거운 트럭에 깔려죽었다. 테레자는 그렇게 운명같은 사랑을 바랬는데 트럭사고도 운명이었을까. 프란츠도 타국의 객지에서 정체도 모르는 괴한에게 맞아죽는다. 한 번의 삶은 한 번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들이 들고가는 짐은 없다.

마지막 부에서는 시골에 정착하여 마을 사람들과 춤을 추며 단란한(?) 삶을 사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나오면서 끝난다. 제법 훈훈한 장면인데, 트럭사고로 깔려죽는 것과 이런 단란하고 행복한 삶이 대비되면서 씁쓸했다. 얘들은 그 미래를 모르겠지. 얘들은 몰라서 그 상황이 행복하지만 나는 몰라서 불쌍해 보였다.


인물 묘사

개인적으로 줄거리 자체만으로는 크게 감동이 없었다.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의 심리와 삶이 이 소설의 주요소였다..고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되짚어보니 꽤나 흥미로운 줄거리다.

인물마다 특별한 개성도 개성이지만 그런 성격을 가지게된 배경과 과거도 인상깊었다. 지금 이 인물의 이런 행동과 사고 방식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구나 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작가들이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심리학’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거꾸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문학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테레자의 과거가 인상깊다. 테레자는 참 연약하고 자존감도 낮은 인물이다. 그 배경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는데, 결혼에 실패한 후에 히스테리가 꽤나 심한 여자다. 인생의 실패를 남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운명의 책임을 테레자에게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테레자의 엄마도 수줍고 아름답던 처녀일 때가 있었다. 다만, 아홉 명의 구혼자중 ‘가장 남자다운’ 한 명에 의해 강제(?)적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해서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낳은 아기가 테레자다.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참, 이렇게 보면 그 어쩔 수 없는 우연의 힘이 인연이나 개인의 노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소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또다른 수확은 ‘키치’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게된 것이다. 이 단어는 사비나가 토마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부터 나온다.


모든 점에서 키치와는 정반대라서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키치의 왕국에서 당신은 괴물이야.


키치는 간단히 대중적인 하찮은 예술품 또는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나오는 키치는 조금 다르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는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똥’ 앞에서는 부끄러워 감추지 못해 안달이 난다. 우리 존재가 이 ‘똥’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도 마땅히 우리 존재의 필수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린 볼일을 굳이 사적인 공간을 만들어서 볼 필요가 없다. 왜? 전혀 부끄러울게 없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니까. 하지만 우린 그러지 못한다. 남들 앞에서 보란듯이 똥을 쌀 수 있는 사람은 갓난 아기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삶 또는 본질을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생각, 사상 또는 문화를 키치라고 부른다. 쿤데라에겐 존재의 가벼움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키치’를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고정관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키치’는 자체가 예술품 처럼 대중들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덧없음을 외면한채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삶을 바라본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지루함과 어려움

시점(時點)과 시점(視點)이 왔다 갔다 하고 상징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내 문학적 이해도가 딸려서 읽기 어려웠다. 사실 책을 덮고 난 뒤에는 ‘..뭐지?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억지로 뭔가를 끄집어 내려고 하기 보단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다시 내용을 되짚어보고 인물들에 대해서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막 적어나가다 보니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새삼 자신이 느낀 바를 정리해서 풀어내는 비평가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열심히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정리해야겠다.

이런 삶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들은 허무주의에 빠져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우리가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도 한다. 한 편 모두가 똑같이 한 번 뿐인 가벼운 존재, 괜히 삶에 대한 부담이 덜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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