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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Aug 09. 2017

보다 쓰다.

보다 쓴 이야기

느끼다


종이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책을 볼 때 일부러 종이를 집은 두 손가락을 비벼보곤 했다. 눈을 밟는 듯한 뽀득이는 소리, 건조하면서도 손끝에 달라붙는 촉감은 다음 장까지 한참 남았는데 넘길 준비를 하게 했다. 나는 종이를 많이 만질 수 있는 책이 좋았다.


읽다


분명히 흰 종이에 까만 글씨뿐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엔 표현할 수 없는 색들이 칠해지고 있었다. 그 간결함이 불러내는 풍부함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원할 때마다 이 마법을 경험하고 싶어 책을 읽었다.


쓰다


읽은 책이 꽤 쌓이고 시간과 같이 멀리 흘러가버린 책들이 있었다. 서로 섞여서 뿌리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떠돌았다. 뒤에 남은 여운은 내 것 같으면서도 금방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 기록하고 정리해놓고 싶었다. 그래서 독후감을 썼다.


느끼다 2


시를 읽었다. 윤동주의 '서시'는 내 생에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책 한쪽이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다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똑같은 약속을 나하고 했다. 그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글의 힘을 느꼈다.


느끼다 3


소포클레스는 이천 년 전에 이미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이천 년 뒤의 내가 진실에 점점 다가가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걸 설명할 수 없다. 그때 알았다. 이야기로 마음을 움직이는 몰입감을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관찰이 있어야 한다. 고전은 단순히 오래 묵은 작품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이었다.


느끼다 4


'레미제라블'에서 '선'을 실천하려는 장발장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보다 외면받은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하고 어두운 삶에 마음이 무거웠다. 형편이 좋았던 빅토르 위고는 그들의 삶을 남일로 여기지 않았다. 문학은 재미와 감동도 주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했다. 온몸으로 현실을 체험하고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나도 사회와 역사에 눈을 뜨고 진실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쓰다 2


연습장에 내가 쓴 글씨가 빼곡했다. 활자처럼 반듯하진 않았지만 뿌듯했다. 남이 쓴 글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쓰는 것 자체가 좋아졌다. 꼭 감상문이 아니라도 가끔씩 떠도는 생각을 붙들어 썼다.


느끼다 5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미래는 암울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꼼꼼한 묘사로 탄생한 상상 속 사회는 사실주의 소설보다 실감 나고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줄거리와 개성 있는 인물뿐 아니라 세계관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도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싶었다. 그때 작가가 이야기꾼 이상의 예술가로 보였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도 예술가였을 것이다.


느끼다 6


책에 나오는 인물들과 사회는 내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정의관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많은 생각이 여과되어 들어오고 한 번 더 걸러져서 나갔다. 가치관이 뚜렷해지고 굳건해지면서 분노를 느끼는 일이 늘었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 않았다.


쓰다 3


글쓰기는 머릿속의 생각으로 나 자신을 한 번 더 납득시키는 과정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전에 나에게 한 번 더 검사받았다.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이 같다는 치명적인 단점은 대대로 물려받은 안동 권씨의 자존심에 맡겼다. 언제나 어휘력의 한계, 얕은 지식과 부족한 이해 그리고 빈약한 논리를 마주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던 비트겐슈타인이 떠올랐다. 내가 넘어설 벽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쓰기로 했다.


계속 쓰다


다른 것 다 있어도 돈이 있어야 인정받는 부자보다 모든 걸 잃어도 자기만의 색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는 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삶이란 살아남는 것이지만 오직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채워져야 한다면 너무 아쉽다. 그래도 통장에 찍힌 숫자보다 글 한 편이 나의 흔적을 세상에 더 뚜렷하게 남길 것이다.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찾은 사람은 나를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읽고 느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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