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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민 Jan 08. 2018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세계사 속의 어린이

부모의 직업이 곧 자식의 일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부모의 일을 물려받기 위해 살았던 그때에도 아이에게 ‘장래희망’을 묻는 어른이 있었을까. 타고난 신분은 사라졌어도 산업혁명 직후의 아이들은 값이 싸고 활용도가 높은 부품이었다. 기계처럼 굴려지고 혹사당할 때 내일도 일주일 뒤도 예상이 가는 삶에서 미래를 꿈꿨을까. 아동의 노동 착취 금지 협정과 교육의 의무화 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들이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조금만 과거로 되짚어 올라가 봐도 아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회에 변화를 일으킨 인류 역사적 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어떤 변혁을 일으킨 기록은 없다. 어떤 정보도 없이 세상에 갑자기 나온 그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기까지 어른들의 경험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의 판단을 떠나 일단 믿고 따라야 한다. 결국 아이들의 미래는 어른들의 손에 달려있다. 이 말은 아이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인의 각성과는 달리 사회적 변화는 무척이나 예민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필요로 한다. 변화를 대하는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구성원들의 동의와 준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고 난 뒤 시대적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다수 중에 겨우 따르는 사람과 따르는 것도 벅차 포기하고 뒤에 머무르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따스함을 품은 이념이라도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없다. 아동이 처한 문제의 개선은 어른들이 자신의 앞가림을 하고도 여유가 생겼을 때나 가능했다. 딱 준비된 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만 변하고 발전해왔다. 너무 이론을 내세워 어른들의 죄책감을 자극할 것도 현실을 내세워 아이들을 겁줄 것이 아니다.

아동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유기되거나 살해되기도 했고(수렵채집 시기), 필요에 의해서 더 많이 태어나고 길러지기도 했고(농업사회), 깨달음에 의해 그동안 외면되어 온 몇 개의 권리가 보장되기도 했다(종교 및 근대화). 어떤 쓸모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방향으로 그 지위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과거부터 쭉 훑어 내려오면 현재의 한구석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와 아이들이 처한 환경은 어떻고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한국의 아이들’이라 하면 공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요즘 아이들의 학습량은 웬만한 노동 못지않다. ‘해아할 것’들 사이에 ‘하고 싶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라는 목적 덕분에 치열한 경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분명 과거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함을 말한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이 떠오른다. 아직 사회적 욕구와 자아실현을 언급하기엔 이른 것일까. 순간 회의감이 찾아온다. 아이들은 과거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느낄 수 있는 행복과 감당해야 할 세상의 무게에는 어떤 절댓값이 있는 것일까.

책의 저자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록과 자료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생각을 펼치며 그의 한계를 밝힌다. 그래서 글의 힘이 빠진 것은 아쉽긴 하다. 게다가 번역은 우리말 같지도 않은 문장을 만들었고 수많은 오탈자가 있어서 짜증도 났다(특히 잘못된 형용사와 부사의 조사와 독해를 방해하는 어순). 그래도 읽어보고 생각해 볼만한 주제임에는 틀림없다. 원서로 읽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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