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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리터리박스 Jan 16. 2018

최악의 군대 패싸움 '해병대 공군학교 습격사건'

아후.. 창피해 ...

해병대 공군학교 습격사건은 해병대 잡는 공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 해병대 최악의 흑역사로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1966년 8월 8일 월요일,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들이 새벽에 대한민국 공군의 구 공군비행학교를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당했던 실제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6년 8월 7일 일요일 오후 7시 20분쯤, 부산발 진해행 마지막 버스인 경남 영228호가 비행학교 후문 입구 근처인 덕두 정유소에 정차하자 공군 장교 3명이 뒷문으로 승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있던 술 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들이 승차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이에 다시 공군 장교들은 앞문으로 타서 차 안에 들어 왔으나, 해병대는 차 안에서 시비를 걸었고, 공군 장교들이 이들을 묵묵부답으로 상대하지 않자 해병대 장교들은 발끈하여 한 공군 장교의 작업모를 빼앗아 서로 던지며 희롱했습니다. 이에 참지 못한 공군 장교가 해병대 장교의 몸을 밀쳐 자신의 작업모를 되찾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공군 장교들이 숫적으로 열세여서 집단폭행당한 후 차 밖으로 팽개쳐졌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허도창 공군 상병이 해당 사건을 비행학교에 바로 알렸고 이에 분개한 조종피교육생 정성규 소위 등 공군 동료 장교 16명이 동교 309호 트럭을 타고 앞서간 해병대가 탄 버스를 추격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웅천에서 해병 장교들을 붙잡아 집단구타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사건과 무관합니다)

공군 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 장교들은 해병학교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렸는데 이 사실을 들은 해병 장교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당직 교육생 몇 명을 제외한 해병장교 129명이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했습니다. 무임승차로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나눠 타고 김해 공군비행학교 입구인 평강(平康)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129명의 해병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으로 이동하여, 마치 잠복전투훈련이라도 하듯이 비행학교 정문을 기습했습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공군헌병 김용만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습니다. 김 병장의 안내로 새벽 5시 50분 쯤에 조종학생 내무반에 도착했고, 해병 장교 129명은 4개 내무반에 분산침입, 돌과 운동기구와 주먹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습니다. 



이 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하여,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최성만 중령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사과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전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습니다. 이에 비행학교 장병 약 3백여 명이 뛰어나와 연병장에서 해병장교 129명에게 덤벼들었습니다. 4백 명이 얽힌 패싸움은 10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져서 공군장병들에게 밀리다가 결국 쫓기게 된 해병장교들은 도망치다가 공군장병들에게 "더 추격해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하고, 그래도 쫓아오자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S28A형 항공기 TA858호 좌측 날개 전면 3개소, 우측 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면, TA 886호의 하우링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습니다. 



공군 장병들에게 얻어맞고 도망가던 해병 장교들은 오전 7시쯤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황급히 달아나는 가운데 이의일 해병 소위가 철조망 밖 늪에 빠졌습니다. 패거리들에게 구조되었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비행기 2대가 파손되었고, 중상자는 도합 39명, 사망자는 1명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국방부는 처음엔 패싸움 가담 군인들을 모두 파면 및 처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살벌한 남북대치 상황에다가 한창 월남전 파병까지 하고 있던 상황이라 한 명의 장교도 아쉬웠던 현실을 고려해 해병·공군을 합해서 18명만이 구속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으며, 싸움 당사자인 두 학교가 자매결연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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