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6살에 시집을 갔다. 시어머니의 나이는 46살이셨다. 20살 차이였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혼자였다. 아들 둘과 딸 둘이 있었다. 어머니는 억척이셨다. 그때는 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한겨울에는 수도꼭지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올 때도 많았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물을 드럼통에 받아 놓기도 하였다. 뚜껑을 덮어 놓아도 살얼음이 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얼음물 속에서도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안 끼셨다.
갓 시집갔을 때, 그래도 고무장갑이 부엌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끼는 날은 김치를 담그는 날 뿐이었다. 그것도 한쪽 손에만 끼셨다. 고춧가루 때문이다. 그 외에는 끼는 날이 없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도 고무장갑을 안 끼게 되었다.
나는 부엌일이 아주 서툴렀다. 그리고 느렸다. 항상 바빴던 어머니는 짜증을 많이 내셨다. 자신이 하면 오 분 만에 할 수 있는 것을 며느리는 이십 분이나 걸려 하는데 짜증이 안 날 사람이 있겠는가? 내가 고무장갑을 꼈다 뺐다 하느라고 꾸물댈 때마다, 어머니는 이 물이 뭐가 찹다고 장갑을 끼느냐고 하셨다. “아이고 우리 집에 상전 한 사람 들어왔네.” 하기도 하셨다. 그렇게 잔소리를 자꾸 듣다 보니 잔소리가 두려워졌다. 어느새 나는 고무장갑을 안 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확실히 일이 빨라졌다.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하면 손의 감각이 둔해져서 일이 더 느려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자꾸 쌓여갔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안 끼는 이유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오른쪽 가운데 두 손가락이 없다. 처녀 시절, 일제 강점기 때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잘렸다고 하셨다. 그러니 그 손에 고무장갑을 끼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불편하다. 그렇게 수 십 년을 사셨으니, 찬물에도 더운물에도 피부가 단련이 되어 있으셨던 거다. 자신이 많이 느끼지 못하니, 상대도 그러리라 생각된 것이다. 우리는 상대를 아무리 배려한다 해도 자신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랑은 내리사랑인가 보다. 손주 며느리를 보시고, 손주 며느리가 집으로 올 때는 어느새 고무장갑을 준비해 눈에 보이는 곳에 걸어 둔다. 나는 미처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이제 나의 시어머니처럼 그런 시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그럼에도 장사를 하실 때 계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하셨다. 글을 모르니 가게의 간판도 읽지를 못하셨을 거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우리가 새로 가게를 옮기고 간판을 달 때, 간판을 보고 글이 어떠니 저떠니 하며 참견을 하시고, 간판장이가 글을 참 못 쓴다느니, 잘 쓴다느니 평하셨다. 글은 몰라도 생김새나 기울임 등은 정확히 집어내셨다. 길 눈도 정확하셨다. 서울에 있는 아이들 집에 갈 때, 어머니는 한 번에 찾아가신다. 혼자 사는 손녀에게 갈 때도, 복잡한 서울길을 지하철과 버스 환승도 잘하신다. 나는 지하철 역명, 환승 번호, 화살표 등이 없으면 길에서 주저앉고 말 것이다.
딸이 중학교 들어갈 때였다. 어버이 날이었다. 할머니 복지관에 가서 한글 공부하시라고 공책과 연필을 선물로 드렸다. 그 사이에 내가 몇 번이나 권했는데도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번에는 딸애가 거들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안 가신다고 하셨다. 사실은 집에만 계시고 그 나이에도 집안일에만 올인하는 시어머님이 나는 힘들었다. 다른 노인들처럼 밖으로 나다니시거나 노인정에라도 가셔서 어울리시면 좋겠는데, 일 년 열두 달 집안일에만 매달리며, 늙어가는 며느리에게 여전히 잔소리를 늘어놓는 시어머니가 힘겨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시게 하고 싶었다.
그때 다시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잘려 나가서 뭉텅 해진 손가락으로 연필을 집는 모양새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마음을 수 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참으로 뒤늦게 알았다. 어머니의 잘린 세 손가락은 어머니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한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을 하면서, 여자 포로들을 가스실로 내보내는 선별을 맡고 있었다. 유태인 300여 명이 교회 안에 있을 때 폭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는데,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아, 300명이 모두 죽게 되었다. 그때의 혐의로 당시 감시원으로 함께 일했던 여자들 다섯 명과 함께 전쟁 후 법정에 서게 된다. 다섯 명은 모두 그때의 일을 부정 하나, 그녀만은 사실 그대로를 인정한다. 법정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한다. 거기에 합류해 나머지 다섯 명의 여인들은 그녀가 그중에서 대표였으며, 그때 그 상황을 결정한 것도 그녀며 서류도 그녀가 작성했다고 한결같이 그녀를 지목했다. 그녀는 명령을 받아서 할 뿐이었지 서류를 그녀가 작성했다는 그 점만은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 재판장은 그들의 필적을 검사하도록 했다. 백지와 펜을 받아 든 그녀는 무척 당황한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다. 그토록 강하게 부정했던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여인들은 경량을 받으나 그녀는 무기징역을 받는다.
그녀는 글을 몰랐던 것이다. 글을 모른다는 것을 들어내기 싫어서, 30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엄청난 무게의 죄목을, 무기징역의 형량도 불사하고 자신이 했노라고 지백 한 그 여인의 단 하나 남은 자존심. 그녀에게 있어서는 평생 감옥살이를 선택하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든 것에 앞선, 가장 큰 수치심이었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 글을 깨우치고 책을 스스로 읽으며 행복해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예전에는 놀이문화가 많이 없기도 해서였지만 나는 유독 책 읽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작은 오빠가 만화방에서 빌려온 무협지도 오빠가 잠든 사이에 몰래 가지고 와서 밤새워 읽기도 했다.
시집가서는 더 많이 읽었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내가 유일하게 내 시간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책이었으니까. 아마 평생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가 결혼해서 십 년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런 내가 글을 모르는 어머니에게 이쁘게 보일 리가 없다. 일은 느려 터지게 하는 것이 일에 집중해도 뭐 할테데, 일을 손에만 놓으면 바로 책을 집어 드니 말이다. 어머니 눈에는 얼마나 보기 싫었겠는가. 가게일도 바쁘고 집안일도 힘든데, 며느리가 손 빠르게 척척하면 좋은데 딴짓을 하니 말이다.
어머니는 이웃이 놀러 오면, 한 번씩 비아냥 거리셨다. “우리 집에 대학 교수가 한 사람 들어왔어요.” “내가 뒤늦게 상전 모시고 살아요” 하며. 그런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내가 오래도록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아킬레스건을 이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