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마도로스였다. 15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키잡이부터 시작하셔서, 일본 전문학교에서 수학하시고 선장 면허를 따셨단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하셨고 나의 큰언니인 딸이 있었다. 전문학교에 들어가니 모두 일본의 어린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십 년 차를 극복하시고 그들과 수학하셨단다. 엄마 말로는 조선인이 선장 면허를 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키잡이로 십 년을 넘게 뱃일을 하셔서 그 경험으로 논문을 썼는데 논문을 보고 심사하시는 분이 큰 감동을 받아서 합격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외항선(무역선)을 타셨다. 그 당시 무역선은 한 번 타면 2 ~ 3년 정도 바다에서 생활하고,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는 남자인데도 뜨개질을 참 잘하셨다. 엄마는 항상 "당신은 나보다 더 잘 뜨신다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추켜세웠다. 바다에서의 긴 시간에 짬짬이 뜨개질을 하셔서 돌아올 때는 우리들 옷, 양말, 장갑을 내어 놓으셨다. 오십의 늦은 나이에 막내인 나를 만나고서는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 모른다. 내가 눈에 밟혀 무역선을 못 타시겠다고 국내선으로 바꿔 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말 나를 이뻐하셨다. 밤에도 나를 사이에 두고, 엄마 아버지가 주무셨다. 아버지 몸에는 크고 깊은 상처가 많았다. 거친 항해 길에 다친 상처다. 장딴지에는 어린 내 손가락이 푹 들어갈 만큼 깊은 상처가 있었다. 나는 그 속에 손가락을 넣고 아버지를 간질였고 아버지는 행복해하셨다.
아빠를 따라 몇 번, 배를 탔다. 선장실은 갑판 꼭대기에 있었다. 갑판 꼭대기 선실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기억도 있다. 한밤에 변이 보고 싶어 졌다. 아빠 손을 잡고 갔다. 내가 앉아 힘을 주어 변을 보고 나면 한동안 적막이 흐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다를 가르는 파생음이 피~용, 어둠의 천지를 깨우던 소리도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모두 어려울 때였다. 남자들은 선원으로 취직하고 싶어 했다. 가정을 떠나서 오랜 시간 바다를 항해하는 거친 생활이지만 한 번 나갔다 돌아오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부탁을 위해 많은 분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런 청탁에 대해서는 강경하셨다.
아버지는 청렴하셨고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아버지를 추억하며 종종 하시던 이야기 목록 중의 하나다. 어느 분이 청나라 양단 두루마리 천을 가지고 오셨단다. 엄마는 그때, 유독 그 양단 천이 욕심이 나더란다. 용기를 내어 받았단다. 그래도, 함부로 옷을 만들지는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허락을 받으려고 말을 했더니 아버지는 한마디 딱 하셨단다. "돌려주고 오구려. “
나도 그 당시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일 것이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그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지금의 좌천동 어드메였다. 집이 개천가에 있었는데 방금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이었다. 그 당시에는 판잣집이 많기도 했다. 집주인을 만나 돌려주고 나오면서 엄마가 한 말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세상에, 왜 이런 짓을. 이 양단 천을 구하려고 뭘 팔았을까? 그런 것을 받고, 내가 미친년이지."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그 집 사정을 말하면서 엄마가 대신 아버지에게 그 사람 배 타게 해 주라고, 청탁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양반, 일언반구도 없어."
그때만 해도 항해 전문 기술자가 많지 않은 시절이어서인지 아버지는 육십이 되도록 배를 타셨다. 퇴직을 하시고 집에 계셨을 때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에는 항상 문 밖에 나와 나무 의자를 놓고 앉아 계셨다. 그리고, 내 책가방을 받아 주셨다. 아버지는 배를 타지 않고 집에 계실 때는 커다란 지도를 방바닥에 펼쳐 놓고 오래오래 보셨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엄마는 10살 차이였다. 아버지 50세, 엄마 40세 때 나를 낳았다. 50세에 자신의 품에 들어온 나는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하는 공주였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 아버지는 오랜 마도로스 생활을 은퇴하시고 집에 계셨다. 마도로스 생활을 하시던 중, 다쳤던 다리로 한 다리를 약간 절으셨다.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 그때는 아버지 대신 엄마가 일을 벌리셨는데, 연탄 대리점을 하셨다. 장사가 참 잘 되었던 때였다. 지금으로 치면 작은 주유소 급이지 싶다.
중학교 입학시험 때였다. 그때는 중학교도 제1학교, 제2학교식으로 시험이 있었다. 체력고사가 있던 날, 엄마는 장사일로 사정상 못 오고 아버지가 대신 오셨다. 오전에 치르는 시험이 끝나고 아버지가 날 찾아왔다. 나는 엄마를 찾았지만 아버지 혼자였다.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으려고 하자, 나는 아버지 손을 뿌리쳤다. 왜 엄마가 안 왔느냐고 투정을 부리고 울었다. 아버지가 달래며 점심을 먹이려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려고 해도 나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버지는 나를 달래다 달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셔야만 했다.
시험을 다 끝내고 혼자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버지는 내 눈치를 보며 밥상을 내놓았다. 점심도 굶어 허기에 지친 내가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뿌듯해하며 웃으셨다.
뒤에, 아주 많이 뒤에, 내가 엄마를 화내게 할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나에게 퍼부은 말이다. “저년이 부처 같은 지 애비를 울린 아이야.”라고. 아버지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막 흐느끼셨단다. 막내딸 체력고사 시험 때 점심을 굶겨야 했던 아버지 심정은 어떠하였을 것이며, 영혼까지 팔아서 무언가를 해 줘도 아깝지 않았던 막내딸이, 자신을 그리 대접한 것은 또 어찌 설명을 해야 할까. 철이 들면서, 엄마가 한 그 말이 나를 쿡쿡 찔러대었다. 70이 된 이 나이에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에 아린 통증을 느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나에게 퍼부었던 그 태산 같은 사랑은 늙은 아버지의 추레함으로 덮여버렸다. 소녀는 사랑, 그 깊은 마음속 안에 담긴 사랑은 보지 못하고, 겉의 추례함만 보았던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사랑을 무색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나이 든 누군가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사랑이라 말하기보다, 애긍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누군가가 나이 든 그대를 모른척하거나 적대시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그것은 그가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늙음, 그 육신의 추레함이 싫을 뿐이니까.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꽤나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 속의 대화다. ‘인생 다 각자 걷고 있지만 결국 같은 곳에 다다를 우리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태만 다를 뿐, 노년, 인생의 끝자락의 그 물리적인 현상은 같다. 단, 내가 그 시간에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