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준 종합병원 옆 길, 작은 운구차였다. 병원 문을 빠져나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50대는 넘어 보이는 상복 입은 여인이 따라오면서 운구차를 계속 쓰다듬으며 흐느낀다. "엄마, 엄마, 잘 가레이, 편하게 가레이,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좋은 데로 가서 편하게 쉬레이."를 염불처럼 읊조리며 운구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나올 때까지 따라온다. 피할 길이 없는 좁은 골목이라 운구차 뒤를 따라 대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로로 나왔을 때,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 눈물은 지하철을 타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50이 넘은 세상 풍파 다 겪은 중년 여인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소리는, 가슴속 밑바닥 어느 구석에, 삭이지 못하고 통째로 끼어있던 덩어리가 올라오면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대는 듯한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게 했다.
엄마의 말년에는, 위로 오빠와 언니는 결혼을 하여 멀리 떨어져 각자의 생활에 여념이 없었고, 막내인 내가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 집안의 막내는 엄마에게는 장미의 가시다. 엄마는 나에게 지극 정성이었고, 아픈 몸을 내색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셨다. 그러나 그 아픔은 감출 수 없는 단계까지 왔고 폐암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와 엄마는 병과 사투를 벌였다. 대학병원에서, 개인병원으로, 집으로, 또 대학병원으로, 병은 진전되었고 엄마는 식음을 끊는 순간이 왔다. 아침, 빈방에서 혼자 눈을 뜨고, 병원에 들러 엄마의 상태를 보고, 직장에 출근했다. 퇴근해서는 엄마 곁에서 많은 밤을 함께 보냈다. 내 하얀 피부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여드름이 얼굴을 덮으려 했다. 이 약국, 저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 친구와 재잘거림의 순간에도, 나에게는 돌아가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22살의 내 젊음은 홀로 집에 누워있는, 때로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로 인해 굴레에 매어있었다.
그런 어느 하루였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출근하기 전 병원에 들렸다. 아침 식사 시간, 엄마는 한 숟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니, 먹어내질 못하였다. 숟갈을 입에 갖다 대어도 입을 닫고 거부하는 엄마에게 '한 숟갈이라도 떠야 살지. ~’ 와락 짜증을 내며 병실을 나왔던 날이다.
그날 오후, 직장으로 걸려온 전화. 하필 그날이었을까, 아침에 짜증을 부린 그날이었을까, 내 오열은 그날 내 짜증의 후회로움과 그리움으로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슬픔의 오열 속에서도,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걸으며 가슴에는 진한 후회와 아픔으로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내 눈에 들어온 하늘은 파랬고, 공기는 맑았고, 내가 걷는 길은 쾌적했다. 어떤 병원도, 약에도 낫지 않았던 22살의 고운 피부에 징그럽게 퍼졌던 여드름은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라졌다. 그랬다, 느끼는 아픔 안에서, 한편으로는 이제 해방이구나 했던 순간, 이제 그 긴 어둠의 시간이 끝났구나 했던 순간이었다.
혼자서 몇 달을 보내다 부산에 사는 큰 오빠네 집으로 왔다. 큰 오빠와 올케언니는 나를 위해, 내가 묵을 작은방을 화사한 꽃무늬 도배지로 단장 해 놓았다. 내 방은 부엌에 딸려 있는 방이었다. 그전까지는 이곳에서 식구들이 식사를 하던 방이었다. 이제 부산에서 큰 오빠네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카들도 예쁘고, 엄마를 잃고 온 나에게 오빠와 언니는 마음을 다했다. 나의 새로운 생활은 편안했다.
어느 날, 아침 잠결에 귀에 익은 도마 소리가 들렸다. '아, 엄마다. 엄마가 무채를 썰고 있구나.' 그 기분 좋은 소리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아, 아닌데.. 엄마는 없는데..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예쁜 꽃 도배지가 눈에 들어오고, 아직도 덜 마른 듯 풍기는 풀냄새, 아.. 그랬다. 엄마가 아니었다. 올케언니였다.
엄마는 세상에 없었다. 예쁜 꽃 도배지가 그렇게 섧게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불을 움켜쥐고 섧게 섧게 울었다. 이런 날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엄마와 살던 내 방도 부엌과 붙어 있었다. 나는 김치보다 새콤달콤 갓 묻힌 무채 나물을 좋아했다. 엄마는 매번 무채 무침을 했다. 한동안은 식당에서 무채 무침만 나와도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50년이 다 되어가는 그 후회와 자책과 그리움의 시간은, 내가 세상 줄을 놓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