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의 빛은 사라져도
청춘의 빛은 사라져도
간이역
추풍령역 경부선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로 444
주변 관광지 : 직지사
동무와 함께일 때는 함께라서 좋고, 혼자일 때는 혼자라서 더 좋은 날, 못다 읽은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혼자 경부선 열차를 탔다. 김천역을 지나고 폐역이 되어 버린 직지사역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고 추풍령역에 나 하나를 달랑 내려놓고 경부선 무궁화 열차는 이내 떠났다.
플랫폼,
아무도 없다.
바람이 분다. ~ ♬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 ♬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 ♬
그 텅 빈 플랫폼에 서 있는데 나도 모르게 이소라 님의 바람이 분다가 입에서 새어 나온다. 완전히 혼자인 나는 플랫폼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이리 깡충, 저리 깡충 그 휑한 순간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기차 들어옵니다.
위험합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어~어디서 들리는 소리지?? 그렇다. 저, 추풍 역 역사 안에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다.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 느낌이 또 왜 그리 좋은지.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무서움이 아니라 보호받고 있음으로 느껴진다. 나는, 금세 말 잘 듣는 아이가 된다. 얼른, 철길을 벗어나 역사 안으로 간다.
아 ~ 여기가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역이다. 나도, 오늘 구름과 바람과 함께 여기서 쉬어 가야지.
추풍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으로 시작되는 남상규 님의 노래 ‘추풍령 고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만큼 대중가요가 국민에게 주는 정서적인 영향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구름도 자고 가야 할 만큼, 바람도 쉬어 가야 할 만큼, 고개가 높고 험난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추풍령 하면 높은 봉우리구나 노래만으로도 짐작게 한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65년에 발표된 노래다. 옛날에야 험준하고 높은 고개였겠지만 지금의 추풍령은 잘 닦인 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하니 그 느낌이 크지 않다. 그렇지만, 그 노래가 그냥 나온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일제강점기의 유물인 급수탑이 있는 추풍령역은 경부선 역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지리적인 조건만으로 우리에게 부각된 추풍령은 또 다른 역사적인 현장으로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에 있는 추풍령 휴게소는,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의병장 장지현이 의병 2,000명을 이끌고 왜군 2만 명을 맞아 치열한 싸움 끝에 물리쳤고, 다시 공격해온 4만 명의 왜군에게 맞서 팽팽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또다시 일제 침략에 굴복당하고 식민지로 있을 당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급수탑이, 그 시대의 역사를 입증하기 위하여 제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급수탑은 작은 공원 안에 있었다. 얇은 철문이 빼꼼히 열려있다. 문을 밀고 공원 안으로 발을 들이민다. 사람이 밟은 흔적 없이 11월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검은 구름이 어디선가 밀려온다. 순간 바람이 휙 ~ 불면서 쌓여있는 낙엽을 흩날린다. 그 을씨년스러움에 문득, 폭풍의 언덕 위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로마가 한 나라를 정복하면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 목표물로 가기 위해서다. 바다로 침공하는 것보다 육로로 침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빠르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곳곳에서 '로마 다리'라는 이름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한때 '세계는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실감케 했다.
그처럼, 일본 식민지 시대,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왕성하게 펼친 사업이 철도사업이다. 우리나라를 발판으로 그들은 세계로 뻗어나가겠다는 야심 찬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그런 역사의 유물이 이곳 추풍령역에 있다.
한때 그들에게 침략당하여 내 나라를 뺏기고, 말을 뺏기고 자기네들 싸움에 우리 젊은 청년들을 끌고 가 생명을 잃게 하는 수모를 겪은 시기가 저 급수탑과 같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겨우 70여 년, 우리는 눈부신 발전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새로운 시간을 이어 기록한다. 지난 시간의 꼬투리를 잡고 끙끙거리느라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진정한 복수는 상대에게 그 책임을 물어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보다 나아지는 것이 아닐까.
추풍령역 그리고 급수탑, 나의 청춘과 함께 간 시간들, 청춘의 빛은 사라져도 슬퍼하지 않으리, 그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방문일 : 201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