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화본역

# 청춘의 빛은 사라져도

by 칠십 살 김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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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본역(花本驛)

간이역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산성가음로 711-9

인근 관광지 : 화본마을



역마다 정거하는 무궁화 열차. 역마다 정거하는 느림보 기차, 느림보 기차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나 탄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온통 젊은이들이다. 이런 느린 열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 걸까? 그들도 느림의 미학을 터득했다는 말인가? 젊은이들을 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바꿔야겠다.


플랫폼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급수탑. 우뚝 솟아 있는 급수탑으로 화본역은 더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서둘러 급수탑 쪽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급수탑으로 가는 길에 펼쳐진 푸름이 눈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예쁘다. 친구는 폰에 푸름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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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수탑은 일제시대 때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했다가 디젤기관차가 나오면서 그 쓰임을 다하게 되었다. 다른 역의 급수탑과는 다르게 문이 열려있다. 화본역을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배려라 생각되어 감사하다.


급수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급수정이 있다. 디딤돌에 올라가 안을 들여다보니, 증기기관차에 어떻게 물을 조달했는지, 급수 원리가 그림과 함께 자세히 나와 있어서, 이해를 돕는다. 급수정 안에는 재미있는 글도 보인다. <석탄정돈> <석탄절약>, 글씨체와 선명도를 보아서는 예전 그 시대의 것은 아닌듯하다,


화본역은 중앙선에 위치해 있는 역으로 버스 교통이 발달하지 않는 곳에 있다. 기차 운행도 몇 차례 없어서, 쉽게 찾아 나서기가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원래, 귀하고 고운 보물은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있다. 어렵사리 보물을 찾았을 때의 경이감. 화본역을 보는 순간, 그와 같은 느낌. 와~ 화본역이 이렇게 예쁜 곳이구나.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역무원 모자가 고객을 위해 나란히 놓여있다. 친구는 모자를 쓰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곳에서도 한 컷, 저곳에서도 한 컷, 아이들처럼 스탬프도 찍어야지. 마음은 벌써 우리 어릴 적, 그때로 돌아갔다. 이런 우리 모습을 보고, 역사 안 대기실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소?"

"부산에서요."

"와이구, 멀리서도 왔네. 여기 뭐 볼 거 있다고.. 여 사는 우리는 하나도 볼 게 없는데, 뭐 볼 거 있다고 오는지."

"마을이 너무 예쁜데요. 할머니.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게 싫으세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렇지."

"어떤 게 싫고, 어떤 게 좋으세요?"

"집에 문을 열어놓고 못 다닌다. 예전에는 집에 문 신경 안 썼는데.. 그래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가 좀 되이 좋지, 사람들이 많이 와 주면 그런 거는 고맙지."

할머니는 어디 가시려고 여기 계세요?"

"나는 영천 장에 갈라고."


아, 장 보러 아직 기차를 타고 다시니는구나, 장 보는 목적에 앞서 소일거리로, 마실거리로 가시겠지만. 나도 이런 곳에 살면서 시장 보러 기차 타고 가고 싶다.


역사를 나오니 확 트인 광장이 눈부시다.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을 보고자 우리처럼 쉽지 않은 길을 오신 분들이 수백 년은 됨직한 나무 아래에서 여름을 식힌다. 슬그머니 다가가 그 옆자리에 엉덩이를 비비고 슬쩍 얹는다.


박해수 시인과 대구 MBC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간이역 시비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시비가 눈에 들어온다. 제목은 <화본역> 친구와 나는 한참을 서서 시를 읽어 본다. 속으로 읽어보다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본다. 친구가 말한다.


"와 이래 어렵노, 詩가.."

"나도."


화본(花本)역, 한자 풀이를 생각하며 시를 읽어본다.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음... 이 구절은.. 그래도.. 이해가 된다.


시에 대해 문외한인 두 중늙은이는 어려운 것은 통과, 이해 가능한 것만 마음에 새긴다. 역사(驛舍) 뒤편에 기차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다. 카페에 들어가 라테와 에스프레소 한 잔씩 주문했다. 친구는, 오늘 하루 종일 방실방실 웃는다. 어릴 때 한 동네에서 공기받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했던 내 단짝 친구. 이 나이까지 함께 다닐 수 있다니, 흔하지 않은 좋은 인연이다.


기차여행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설렌다. 설렘에 나이가 어디 있으리.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설렘이 더 커진다. 젊은이들처럼 레일 카페에 들어가 마신 라테와 에스프레소, 커피 맛을 논할 때가 아니다. 그 자체로 우리는 즐겁다.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이라 생각했던 카페. 그것도 레일 카페. 우리 어릴 때, 이런 낭만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굳이, 더 많이 보려 할 필요도 없이, 화본역, 그 자체만으로도 오늘 기차여행의 만족도는 백 퍼센트다.


화본(花本역), 아름다움의 시작점,

그곳에, 또 가고 싶다.


방문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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