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미술 전시, 어떻게 봐야할까?
문화생활을 가장 많이 하는 세대는 20대, 문화 빈곤층은 30대라고 합니다. 돈은 있고 시간은 없는 30대, 육아를 하면 더더욱 문화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는 아트 불모지의 일상. 디자이너인 저는 그 갈증이 극에 달아, 아이를 아기띠에 매달고 미술관이며 아트 전시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마음껏 만지고 놀 수 있는 전시가 가장 좋지만 그런 전시만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이용 아트 클래스를 듣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이면 부모와 아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이 많았죠.
해외는 어떨까요. 뉴욕 휘트니 박물관에는 부모와 신생아를 위한 “유모차 투어”가 있을 정도로 아주 어릴 때부터 미술관 관람을 자연스럽게 시작합니다. '미술관에서의 활동'은 미적인 소양을 키워주는 것도 있지만, 미술관에서 보고, 그림을 통해 뭔가 만들어 보고, 부모와 공유하면서 (Look, Make, Share) 0-8세 아이들이 사회성과 공감능력, 감수성을 잘 발달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연구, 2015)
뉴욕이 아닌 이곳 한국에서, 유모차 투어가 아닌 '아기띠 투어'부터 시작한 저는 몇 년간 나름의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아이 전용이 아닌 전시에 갈 때마다 제가 걱정한 것은 1. 미디어 아트 전시라고? 아이가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2. 명화가 잔뜩 걸려있다고? 아이의 수준에 맞지 않는 걸 내가 보고 싶어서 끌고 다니는 건 아닐까, 3. 사진 전시라니... 좀 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죄책감을 떨치고, 미술관에서도 아이와 엄마 모두 전시를 즐길 수 있는 작은 팁들을 소개합니다.
가기 전 작품을 보고, 이야기 해보자
방에 굴러다니는 오르세 미술관전 팸플릿을 뒤적이던 밀키는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을 보면서 “이 아줌마, 허리 아파.”라고 말했습니다. 색다른 지적이었죠. 저는 “왜 허리가 아플까? 뭘 하고 있는 걸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밀키의 대답은 이러했죠. “음.. 인사하고 있어.”
‘이삭줍기'는 수확 후 밀알 한 톨이라도 주워야 하는 가난한 농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인사하는 것이 소위 '정답'은 아닐지라도, 이들이 밭에 주인에게 평소 허리 굽혀 인사해야 하는 입장이지 않았을까,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이는 그림에서 어렴풋이 느낀 게 아닐까. 아전인수격일지 모르지만 아이의 대답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우연히 이 그림을 지나쳤는데, 밀키는 '앗, 저거!' 하면서 알은척을 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해석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기억한 이 그림이 아이의 뇌리에 더욱 오래오래 남는 게 아닐까 하고 여겨졌죠. 전시에 앞서 그림을 함께 보며 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가면, 아이도 낯설지 않고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작품과 똑같이 따라 해보자
린다 매카트니 사진전에 갔을 때, 폴 매카트니가 아들과 함께 목장에서 팔을 쭉 펴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아빠에게 안겨있던 밀키는 팔을 쭉 펴더군요. 아빠도 따라 쭉 폈습니다. 헤헤헤 웃는 모녀는 잠시 사진 속 목장에 있는 듯 했습니다. 어린 아기였던 밀키는 아직 말을 잘 못했을 때지만, 이 순간을 무척 즐거워했죠.
앤서니 브라운 전에 갔을 때도 밀키는 벽면을 따라 그려진 원숭이와 고릴라의 행동과 표정을 따라 하며 전시를 자기만의 것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른용, 아이용 전시라는 편견은 아이에게 없었습니다. 또한 보이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능력은 놀랄 만큼 뛰어납니다. 비싸고 유명한 명화 앞에서도 격의 없이 따라 해보며 웃어넘기는 것이 어른에게는 조금 용기가 필요할지 모르나 아이를 동반한 어른에게는 면죄부가 있답니다. (아이가 있어서 정신 나간 어른처럼 보이진 않더라고요!)
관람 - 휴식 시간 배분이 필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가보니, 어린아이들이 미술관 바닥에 자유롭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관람객에게 조금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이 어린 예술가들에게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진지하게 명화와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끄적이고, 저는 그 장면이 참 좋아 보였습니다. (내 아이도 저기 좀 앉아서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죠ㅎㅎㅎ)
런던이나 프랑스, 핀란드, 미국 등 여행으로 접한 다양한 선진국의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 관람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관람해도 되는 어린이용 미술관에서와는 달리, 부모와 함께 보는 공공 전시에서 아이는 전시를 보는 매너도 배우게 되지요. 조용히 해야 하고, 만지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간의 특성상 아이의 마음이 조금 경직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관람 중간중간 휴게 장소에서 간식을 먹거나 뛰어다니는 등 아이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한 팁 중 하나입니다.
디뮤지엄에서 열린 <아홉 개의 빛, 아홉 개의 감성> 전시에서 손 장난을 치며 놀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여러 미술 전시를 다니면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전시 관람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들어가 본 민화 전시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간 제게 민화는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그림 같았고, 빠르게 보고 나올까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민화를 주의 깊게 살피더니 자신에게 익숙한 물건들을 찾아냈습니다. 우리나라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는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주변에 있을법한 것이었습니다. 복숭아, 개구리, 닭, 책, 붓, 심지어 숨어있는 안경과 어린이까지 속속들이 찾으며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해석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개구리가 닭을 무서워해, 저 수박 먹고 싶다’ 처럼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아이는 자기식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고, 저 또한 아이의 시선을 통해 작품과 전시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된 계기가 됐죠.
그 후로 저는 전시에 가서 먼저 그림을 판단하고 아이에게 설명해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이건 뭐 같아? 어때 보여? 왜 이게 여기 있을까”
등 열린 질문을 통해 아이 생각을 물어봅니다. 아이는 자기 깜냥만큼의 이야기를 하고, 늘 그 대답들은 신선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으면, 아이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또한 부모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을 토대로 남의 생각을 존중할 줄도 알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작품을 읽는 능력도 높아집니다. 이런 아이들이 많아지면 훌륭한 생각들을 더 많이, 서로 공유하게 되겠죠. 미술관장도, 미술학자도 아니지만 한 사람의 엄마이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전시 관람의 즐거움은 열린 대화를 하는 것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이라는 곳이 뭔가 고급진, 어른만의 공간이 아닌, 친근한 곳이라고 아이가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 간 기억, 뭔가 재미있는 걸 봤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저는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혹시 아나요. 예술적인 감각들이 자양분이 되어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보다 풍요로운 일상을 살아가게 될지♥
1. 구독하시고 밀키베이비의 재미난 글을 가장 먼저 받아보세요!
2. 인스타그램에서도 만나요!
https://www.instagram.com/milkybaby4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