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와 한판 붙는 시각장애인
변해가는 세상 속, 장애인들은 그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오늘도 공부합니다.
여기, 나와 당신의 하루를 가르는 거대한 장벽이 하나 있다. 높이는 성인 남성 평균 키 정도, 너비는 어깨너비 정도 된다. 매끈한 유리 표면은 종종 정체 모를 얼룩으로 빛나기도 한다. 그렇다. 바로 ‘키오스크’다. 누군가에게는 햄버거 세트를 30초 만에 주문하게 해주는 신문물이지만, 나에게는 만날 때마다 눈싸움을 걸어오는 거대한 숙적이다.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편리해진다. 주문은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끝나고, 영화표는 사람 얼굴 한번 보지 않고도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그 눈부신 발전의 그림자 속에서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은 오늘도 키오스크 앞에 서서 공부를 한다. 이 차가운 기계와 어떻게든 소통해 보려는 눈물겨운 사투, 아니 ‘눈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다. 저시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고, 좀 보이긴 하는…?”
맞다. 세상이 온통 안개 낀 것처럼, 혹은 픽셀 깨진 저화질 영상처럼 보이는 상태라고 하면 조금 이해가 쉬울까.
이런 내가 키오스크 앞에 서면, 일단 자존심을 버리고 최대한 얼굴을 화면에 가까이 댄다. 거의 화면에 코가 닿을 듯한 거리다. 행여나 뒷사람이 ‘저 사람 뭐 하나’ 쳐다볼까 싶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 덤이다.
화면 속 글씨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춤을 춘다. ‘신메뉴’라는 글씨 옆에 붙은 깨알 같은 ‘매운맛’ 표시는 그저 빨간 점으로 보일 뿐이다. “이게 매운 거였어?”라며 의도치 않은 ‘맵부심’을 뽐내게 되는 순간이다.
옵션을 선택하는 작은 네모칸들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지 도무지 눈에 띄지 않는다. 감으로 이곳저곳을 눌러보지만, 키오스크는 단호하게 ‘삐빅’ 소리를 내며 나의 사랑을 거부한다. 마치 “너 말고.”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쯤 되면 이건 주문이 아니라 화면 속 개발자와의 숨은 그림 찾기 대결이다.
그 다음 관문은 결제 단계이다. 보통은 오른쪽 맨 아래, 구석진 곳에 결제 버튼이 수줍게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온 화면을 더듬더듬 스캔하다 겨우 찾아낸 ‘결제’ 버튼을 누르면, 나의 눈싸움은 다음 라운드로 넘어간다. 카드를 꽂는 곳은 또 어디에 숨어있는가. 위인가, 아래인가, 오른쪽인가. 결국 더듬더듬 기계 옆구리를 만져보다가 뒷사람의 친절한(때로는 짜증 섞인) 도움으로 겨우 대결을 마친다. 햄버거 하나 먹기 참 힘들다.
이제 내 친구, 전맹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다. 그에게 키오스크는 눈싸움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눈을 감고 싸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면에 무엇이 떠 있는지,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에게 키오스크는 그저 ‘전원이 켜진 따뜻한 유리판’일 뿐이다.
상상해 보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자, 여기 메뉴판. 주문해 봐”라고 말하는 상황을. 메뉴가 무엇인지, 가격이 얼마인지, 어떻게 주문하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말이다. 황당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결국 친구는 용기를 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저기… 죄송한데, 더블 불고기버거 세트 하나만 주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대부분은 친절하게 도와주지만, 가끔은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부탁해야만 하는 그 순간의 민망함과 자괴감. 그것은 키오스크가 우리에게 남기는 보이지 않는 상처다.
이 유쾌하지만은 않은 ‘눈싸움’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남들처럼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내 손으로 직접 고르고, 원하는 영화를 스스로 예매하고 싶을 뿐이다. 기술의 발전이 모두를 위한 것이 되려면,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돌아보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언젠가 키오스크 앞에서 더 이상 눈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애타게 더듬거리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이 글의 제목이 ‘키오스크와 악수하기’로 바뀌는 그날을, 오늘도 즐거운 상상을 하며 기다려본다. 그때까지는…
“헤이 키오스크, 한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