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하니, 갈비 먹고 싶다

가을비, 갈비…

by 은하수별바다

창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지긋지긋한 수학 문제집 위로 고개를 들자, 잿빛 하늘이 온 세상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있었다. 투둑, 투둑,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단조로운 자장가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끝없는 한숨 소리 같기도 했다. 하필이면 저녁 자습까지 있는 금요일 오후. 내 마음도 저 하늘처럼 축축하고 무거웠다.

“가을비라… 갈비 먹고 싶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혼잣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게 무슨 아재개그람. 하지만 한번 뱉어진 말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가을비, 갈비…'

정말 말도 안 되는 의식의 흐름인데 이상하게도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빗소리가 점점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투둑투둑’이던 소리가, 어느새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처럼 ‘타닥타닥’으로 변해 있었다. 귓가에 맴도는 빗소리는 곧 뜨겁게 달궈진 숯불 위로 양념 갈비 한 대가 올라가며 내는 ‘치이익' 소리와 겹쳐졌다. 나는 홀린 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앞에 우리 가족의 단골 갈빗집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한 실내. 그리고 늘 불판 앞을 꿋꿋이 지키던 아빠의 넓은 등이 보였다.

아빠는 항상 최고의 굽기 장인으로 불렸다. 행여나 고기가 탈세라, 잠시도 집게를 놓는 법이 없었다. 적당히 익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내 앞접시에 올려주며 “우리 딸, 아빠가 구운 게 제일 맛있지?” 묻던 목소리. 그때마다 나는 입안 가득 갈비를 우물거리며 “당연하지!”라고 외치곤 했다. 달콤 짭짤한 양념 맛과 아빠의 사랑 맛이 뒤섞여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맛을 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야간 자율 학습과 학원에 찌들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까. 늘 피곤에 절어 퇴근하시는 아빠와 얼굴 마주 보며 밥 먹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된 것을.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갈비를 굽던 그 풍경은 이제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저 갈비라는 단어 하나가 촉발시킨 기억 여행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어쩌면 정말 그리웠던 건 갈비 그 단어를 넘어, 아빠가 정성스레 구워주던 그 시간, 그 냄새, 그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들던, 그 따뜻하고 시끌벅적했던 저녁의 온기였을지도.

나는 가만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번호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메시지를 입력했다.

​[아빠! 오늘 비 오니까 갑자기 갈비가 너무 먹고 싶어요. 끝나고 다 같이 갈비 먹으러 가면 안 돼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세상은 마냥 무채색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왠지 오늘 저녁은 숯불처럼 따뜻하고 갈비처럼 달콤한 시간이 될 것만 같았다.

'띵동!'

메시지 알림음과 함께 핸드폰 화면이 반짝였다. 빗소리는 여전히 맛있게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