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내가 아닌, 다시 태어나는 '나'
축축한 온기가 감도는 욕실,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자 흐릿한 인영 하나가 나타납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문득,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아 보이네."
빈말이 아니었어요. 거울 속의 나는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습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작은 미소 하나가 얼어붙었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것만 같았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온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세수를 마치고 다시 고개를 들면, 방금까지 선명했던 내 모습이 조금씩 번져나갔습니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 무뎌지는 콧날, 사소한 표정의 결까지. 마치 젖은 도화지에 물감이 번지듯, 세상이 나를 천천히 지워내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사라진다기보다, 세상이 나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 듯한 아득함이었죠.
그래서였을까요. 언젠가부터 저는 거울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희미한 실루엣 너머에, 분명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온기가 남아 있었거든요. 손끝으로 만져지진 않아도 분명 살아 숨 쉬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 그것은 스러지는 내가 아니라, 옅은 안개 속에서 조금씩 다시 태어나는 나였습니다.
거울 앞에서 아주 오랫동안 숨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래, 흐릿하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야.’
세상이 나를 아무리 밀어내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 나로 존재하는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오늘도 나는 익숙하게 거울 앞에 섭니다. 흐릿한 세상 속에서 가장 선명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어제보다는 조금 더 다정해진 눈빛으로 오늘의 나를 가만히 마주합니다.
세상의 모든 빛이 꺼진다 해도 이 거울만큼은 마지막까지 나를 비춰주겠지요. 그 속에는 분명히 미소 짓고 있는 희망찬 내가 서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