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 시작하던 날, 나는 울산광역시 동구에 있는 슬도에서 해돋이를 보았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데 ‘너무나’ 추워서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는 순간,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작 렌즈 밖의 해돋이는 보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 순간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사다난 했던 2015년이 지고 있다.
길기도 짧기도 했던 시간들이 찢어져 나가는 달력 사이로 빠져나간다.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웠던 기억들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큰일들도 어쨌든 시간이 데려갔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안에서도, 또 개인적으로도 닥쳐왔던 사건, 사고들로 인해 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대사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수많은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이 이 번역을 다르게 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은 자기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그 예술 언어는 작품 내부에서 생겨나 작동을 하게 되는데 그 토대가 바로 비례와 척도이다.
가장 쉽게는 경험하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면,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골목을 커서 찾아가보고는 그 골목이 그렇게 좁았는지 몰랐다고 놀라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먼저, 아이가 성장해 키도 크고 몸도 커져서 더 높은 눈높이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척도가 달라진 것이다.
- 18개월 된 조카는 10cm 높이의 난간을 조심스레 내려가느라고 난간 한 가운데서부터 저 포즈로 기어갔다.
또 다른 이유는 어린 시절에는 거의 유일하게 그 골목만을 접했던 아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다른 길들을 보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비례가 달라진 것이다.
즉, 비례와 척도는 단순히 수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가치평가와 관련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고통에 익숙해지고 웬만한 아픔에는 무뎌진다. 그것을 성숙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삶 속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통해 아픔과 고통의 비례와 척도가 달라진 탓일 게다.
친구의 사소한 한 마디가 세상 무너지는 참담함으로 다가와 눈물을 보이며 아파했던 소녀도, 어느덧 중년의 여인이 되어서는 여러 사람들의 뭇매에도 한숨 한 번 쉬고
욕 한마디 툭 뱉어버리고선 쉬이 넘겨버릴 수 있는 내공이 생기듯이 삶의 고통도 그 크기가 점점 변해가고 있다.
2015년이 시나브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마음에도 크고 작은 굳은살이 베겼다. 내 자신이 돌이켜봐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떤 아픔에는 무뎌지고 있고, 또 다른 어떤 문제에는 과감해졌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겠지만 12월이 다 가기 전에 오늘 이만큼 살아내고 견뎌내고 삶의 힘겨운 순간을 지나온 내 자신에게 수고했다, 참 잘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얼마 남지 않은 2015년의 마지막 시간들이 더욱 소중해 질 수 있도록 토닥토닥 나를 달래고 안아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오는 2016년에도 어떤 작은 설렘을 기대하며 맞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