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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Apr 23. 2017

#집에서 집으로

짧은 생각

10년 전 쯤의 회고.


26살,

나는 집을 떠나고 싶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와 엄마, 나 그리고 남동생.

꽉 찬 가족들이 있지만 언제나 텅 빈 집이 싫었다.

아마도 무척이나 외로웠나보다.


"엄마, 집에 있어?"


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물었다.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기 전에도, 무슨 일이 있건

중요한 건 집에 엄마의 부재 여부였다.


사실 딱히 엄마가 집에 있다고 해서 일찍 들어간다거나

들어가서도 무엇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엄마가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을 뿐이었다.

아빠는 이런 날 보고 '엄마바라기'라며 놀려대고 내심  섭섭해 하셨다.


나는 27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엄마가 없는 나의 집이 생겼다.

설레고 신나고 살짝은 막막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그토록 그리던 서재도 만들고,

내 마음대로 우리집을 꾸미고 만들었다.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었고 집을 아무리 건드리지 않아도 먼지가 쌓인다는 사실과 한두 가지만 정리하지 않아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차마 눈뜨고 보기싫은 집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빨래는 세탁기가, 밥은 전기밥솥이, 다림질은 다리미가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데 할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하는

수많은 집안일 부적합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세제를 넣고 작동버튼을 누르는 것도, 다 돌아간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고 널고 다시 개고 서랍장에 고이 넣는 것까지도 다~ 사랑이 듬뿍 담긴

사람이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할일은 마치 태산과 같았고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졸졸졸 따라다니며 저지레하는

아이들 덕분에 해도 해도 끝없는 살림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웠다.

엄마의 집이.

그리웠다.

아무도 없는 집이.

그리웠다.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집이.


또 솔직히 고백하자면

빨래는 하면 깨끗해지는 줄 알았는데

삶지않으면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과

다 된 빨래를 언능 끄집어내서 빨리 널지않으면

빨기 전보다 더 역한 곰팡이냄새가 날 수 있다는

사실도 살면서 배웠다.


맙소사.


2년 전,

여러가지 사정으로 나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엄마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옛날처럼의 편안함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살림의 전쟁에서는 해방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엄마의 집에 적응한 지 2년,

삶이 풍요로워졌다.

세상은 참 깨끗한 곳이며 빨래는 참 산뜻한 행위이며

부엌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들이 대기하고 있는 세상.


물론 아침 출근으로 부리나케 나갔다가 돌아와서

흩어져있는 머리카락을 제대로 청소하지 않아서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종종 왕왕

이런저런 엄마의 째려봄과 잔소리에

땀이 나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사는 집에 들어와 있다.


10년만에 엄마의 집에는 4대가 살게 되었다.

나의 미니미들과 함께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다.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사는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집에 산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엄마의 집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제 발로 돌아와 다시 엄마의 집에 산다.


사는 건 참 재미있다.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집에 있어서, 엄마의 집에 있어서

오늘도 웃는다.


엄마의 높은 톤의 부름이 살짝 서늘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집이, 엄마 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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