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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나의 꿈은 국어선생님

 언제부터 글쓰기가 좋아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렸을 때는 무작정 주제에 맞춘 글쓰기를 했다면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는 글을 쓰는 일보다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았다.     


  엄마가 세트로 사준 한국문학 단편소설 전집부터 시작해서 모든 책을 무작정 읽었다. 특히 한국 단편소설은 길이도 적당하고 명료한 문장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나는 항상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은 탓에 국어 과목은 어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서 꼭 배웠거나 굳이 아는 지문이 아니라도 어떤 글이든 주제가 뭔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국어가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어떤 이들은 책을 읽어도 눈으로 지나가고 나면 무슨 말을 한 건지 기억이 안 난다고도 한다. 그럴 때는 소리를 내서 읽는 습관이 정말 중요하다. 소리를 내서 읽으면 단어 하나, 조사 하나까지도 정확히 내 입으로 발음을 해서 그 말들이 다시 내 귀로 들리고 그 의미나 전달력이 눈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좋다. 대학생 때 국어 과외를 하면서 국어 성적이 바닥이었던 친구를 소리를 내 책 읽기 방법으로 국어 1등을 만든 전력이 있다.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국어가 제일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단순하게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님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책도 많이 읽고, 제일 자신 있게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되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든, 중학교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려면 내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나는 내신 공부를 해야 할 많은 시간을 책을 읽는데 써버렸다. 사실 그게 더 편하고 좋았다. 외우는 건 딱 질색인 데다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학이나 여타 과목들까지 우수한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이 싫었다. 그래서 난 ‘수능으로 특차를 가겠다’라는 목표로 과감히 내신성적을 포기했다. 요즘 같은 입시 제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수능으로 대학을 가는 특차와 수능과 내신을 함께 보는 정시, 두 가지 전형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고등학교에는 모든 학생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야·자라 불리는 야간자율학습시간이 있었다. 아침 7시에 학교 가서는 밤 10시까지 공부를 시키는 주입식 교육의 최고봉. 사실 야간자율학습이 있어서 친구들과 더 친해지고 수많은 추억도 생겼지만 다른 친구들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공부를 하느라 정신없을 때, 나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내신 공부는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엄마가 사다 놓은 책, 내가 읽고 싶었던 책,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던 한국 단편소설은 10번 이상씩은 보고 또 본 것 같다. 수능에 나올 수도 있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신나게 책을 읽고 친구들은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시 일기를 적든, 글을 적었다. 그때는 친구들과 교환일기도 많이 쓰고 다이어리도 쓰고, 여기저기에 메모하듯이 많은 글을 적었다. 그래서 글은 최대한 많이 써봐야 확실히 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 저 친구에게 저런 이야기를 쓰면서 내 안에 숨어있던 많은 것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훈련된 나의 글은 친구들 사이에 재미있는 교환일기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은 친구가 교환일기를 쓰자고 하기도 했고, 어느 날인가 지쳐서 모든 걸 멈춘 기억도 있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고, 글이나 쓰던 나는 고3쯤 되었을 때, 이 상태로는 과연 국어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왕성하게도 변했다. 경찰이었다가, 간호사였다가, 군인이었다가, 의사가 되기도 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사주팔자에 나는 금이 많으니 ‘쇠’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라는 지나가는 점쟁이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문과생인 내가 의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게 나의 사주팔자라면 공부해서 의사가 되면 될 것이다. 이게 생각 전부였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 비웃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그 말에 이틀 만에 꿈을 접었다. 일장춘몽(一場春夢)같았다.     


  중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에 힘입어 쭉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대학교를 선택할 때쯤에는 꼭 국어 선생님만이 아니라 광고 관련 기획일이나 카피라이터도 관심이 있으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볼까 하며 중앙대 광고언론학부에 기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아들밖에 모르시는 할아버지나, 그 할아버지의 아들이신 아빠나‘여자가 무슨’ 집을 떠나 학교에 다니냐며 집 근처로 가라고 하셨고,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특차로 당시에는 울산에 유일했던 대학교 국어국문학부에 지원했다.    


  처음엔 학교 선택에 있어서 나의 의견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혼자 속상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서 학교에 다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 가서 좋은 교육을 받는 것도 좋았겠지만 적어도 큰돈 들이지 않고 (자랑을 조금 하자면 장학금도 두 번이나 받았다) 안전하게 학교 다니면서 지역 방송국까지 바로 온 것이 현실이 아닌가.    


  어쨌든 문예창작과와 국어국문학과가 있는 국어국문학부에 입학해서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했지만 선택한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문예창작학과는 없어지고 모두 국어국문학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국어국문학과는 교육학과가 아니라서 만약 국어 선생님이 되는 자격을 얻으려면 교직 이수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다시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야 했다.    


  사실 사람들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거 해서 뭐 해 먹고 살래?”라던가 “쓸데없는 거” 배운다며 혀를 쯧쯧 차기도 하고 “여자는 국어국문학과는 나와야 참해 보이지”라는 이상한 프레임에 씌워놓고 흐뭇해하시곤 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조금은 단순하게 결정했던 나의 꿈은 점점 현실에 부딪혀 갔다. 글을 쓰는 일과 글을 읽는 일, 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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