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는 나라를 뛰어넘었다. 대학교 2학년 초, 갑작스레 휴학하고 나는 막내 고모가 계시는 하와이로 어학연수를 갔다. 정확히는 보내졌다. 어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 학교를 휴학하고 미국행이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막막했다. 그것도 생애 첫 비행이 19시간짜리 하와이행이라니. (지금은 하와이 직항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직항이 없어서 일본에 들렀다가 하와이로 가는 경로가 유일했다) 그리고 나는 영어 문법은 자신 있어도 듣기는 꽝이었다. 그런데 나 혼자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들렀다가 다시 하와이로 가는 미션이 주어지다니.
경유지인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스피커로 일본어가 나오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영어로 또 나오는데 ‘하와이(Hawaii), 딜레이(delay), 인포메이션(information)’ 정도가 들렸던 것 같다.
‘뭐야? 하와이 비행기가 문제가 생긴 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3시간쯤 어리둥절해서 있을 때, 일본인 승무원이 다가와 다정하게 일본말을 했다.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타국에 와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바보처럼 있는 내가 한심했다. 그랬더니 그 승무원은 다시 영어로 하와이 가냐고 물었고,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승무원을 따라 안내대로 갔고 내가 타고 가야 할 하와이행 비행기가 문제가 생겨서 8시간 연착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도 대충 눈치껏 알아들은 것이다) 그리고 공항과 연결된 호텔의 키와 새로 뽑은 항공권을 주며 내일 아침에 탑승하라고 했다. 그렇게 혼자 일본의 한 호텔 방에 들어가 행여나 잠들어서 비행기를 놓칠까 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하와이행 비행기를 무사히 탔다. 그리고 하와이에 가서도 영어를 못 해서 여러 헤프닝이 있었으나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그것들을 다 잊게 했다.
난 하와이에 가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부하러 갔다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에 멍하니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살아온 시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주 3일 열리는 하와이 전통시장에서 하와이 특유의 프린트가 된 전통의상을 파는 고모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벽에 같이 일어나 전통시장이 열리는 하와이 스타디움에 판을 폈다. 옷을 걸기 위한 옷걸이 수십 개를 세팅하고 거기에 상자에서 옷을 꺼내 일일이 걸었다. 그렇게 세팅을 끝내고 나면 하와이로 여행 온 외국인들이 선물을 위해서든 하와이 여행 기념으로 본인들이 입기 위해서는 가게로 왔다. 고모와 고모부, 나, 그리고 당시 10대였던 고종사촌 동생까지 합류해서 장사했다.
그런데 이왕이면 옷이 더 잘 팔리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사촌 동생과 우리 둘이 전통의상을 직접 입고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동양인 아가씨 둘이 하와이 전통 원피스를 입고 장사를 하니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날씬한 편도, 스스로 자부할 정도의 꽃 미모도 아니었는데 엄청난 덩치의 외국인들 눈에는 아기자기한 예쁜 모습으로 비친 것 같다. 우리가 입은 옷은 그날 다 매진이 됐고, 다음 날에 다른 옷을 입자 그 옷도 불티나게 팔렸다. 장사가 잘 되니 자신감이 생겼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도 장사를 하는데 필요한 말들은 정해져 있었다.
“Try on!”, “Looks skinny!”
이 두 마디면 3XL를 입는 덩치 큰 외국인도 만족하며 옷을 샀다. 그렇게 일주일 중에 3일은 엄청난 에너지로 장사를 하고 나머지 4일은 다들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야자수 나무 밑에 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쉬는 날들은 적응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도 서서히 까매진 얼굴만큼이나 전형적인 하와이언이 되고 있었다.
하와이 어학연수는 건강상의 이유로 3개월 만에 끝이 났고, 그렇게 나는 여전히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 했지만,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자신감 하나는 얻고 돌아왔다. 그리고 또 하나 얻은 것은 죽기 살기로 살지 말자는 교훈이었다. 밤잠 설쳐가며 아르바이트를 2~3개 뛰는 것이 과연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글을 쓰겠다고 국어국문학과에 들어와서는 글 하나 쓸 시간이 없는 삶은 무엇을 위한 삶인지 생각하게 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해서 도움이 될만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돈을 많이 주지 않아도, 내가 글을 쓸 수 있고, 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찾게 된 아르바이트가 울산의 맛집 119곳을 정리해서 맛집 책자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책자를 만든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하지만 맛집 한 곳, 한 곳을 최대한 가보고 싶은 곳처럼 글만 적으면 된다는 대표님의 말에 까짓거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맛집을 직접 가봐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군데씩 찾아갔다. 그런데 일일이 음식을 맛을 볼 수도 없고, 그냥 외관만 쳐다보고 오는 꼴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는 어떤 글도 적을 수가 없어서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다 적었다. 그리고 맛집마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내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 맛집은 찬란한 맛집으로 재탄생했다.
한 달여 만에 ‘울산 맛집 119’라는 책자가 발간됐고, 나는 기념으로 한 권 가졌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진짜 맛집인지, 그냥 식당인데 맛집처럼 꾸며진 건지 알 수 없는 그 작업을 하면서 나름 상상하는 훈련을 제대로 한 느낌이다. 사진을 보고 그 맛집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메뉴를 보며 그 맛을 상상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혹시 그 옛날 ‘울산 맛집 119’라는 책자를 보고 맛집을 찾아갔다가 낭패를 본 분이 계신다면 이 시간을 빌려 사죄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