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다니면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실 집에 가는 게 싫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린 시절 집이 조금 시끌벅적했다) 집안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들어가기 겁났던 것 같다. 하지만 처음엔 내가 역마살이 있어서 집에 안 들어가고 싶어 하는구나!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집에 최대한 늦게 가는 방법은 아르바이트였다.
대학생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구함’이라는 종이를 얼마나 보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교차로 같은 신문에서 구인란을 열심히 살피면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당시에는 후들후들했던 아르바이트 면접들이 나중에는 하나하나 경험이 되어 나를 단련시킨 것은 분명하다.
Bar는 친구들과 가던 그냥 맥줏집과 다른 곳이라는 걸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알았다. 사장님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찾아간 나에게 ‘일어서서 한 바퀴 돌아보라’라는 말에 이건 문제가 다르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노래방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기에 나는 단순하게 ‘계산대를 보는 일’이라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학생, 몇 살이에요?”
“노래방에서 뭐 하는 알바인 지 알고 전화했어요?
아뿔싸.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신나게(?) 놀아야 하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잠시지만 괜한 전화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하다는 마음으로 “죄송합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아르바이트는 시급 1800원짜리 삼겹살집 서빙, 스파게티집 서빙 그리고 조금 발전해서 레스토랑 직원, 국어 과외, 논술 과외, 학원 강사 등이었다.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야말로 ‘알바의 여왕’이었다. 돈도 꽤 모았다. 솔직히 일하느라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모았다는 게 바른 말이다.
그렇게 수업은 오전으로 쫙 모아서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모든 수업을 짜고 오후 2시부터 학원에서 국어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것이 마치면 레스토랑에서 새벽 3시까지 마감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1년 가까이 그렇게 생활을 하니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학교를 왜 다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과 친구들과도 소원해지고 무엇인가 피폐해져 갔다. 경험을 위해 선택한 아르바이트가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우선 새벽 시간까지 하던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그나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전공 공부도 저절로 되는 학원 국어 강사 아르바이트는 이어 갔다. 사람은 듣기만 해서는 이해도 안 가고 잘 몰랐던 것도 내가 가르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만 가르칠 수 있다. 학원 강사 일이 그랬다. 수업을 들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던 것도 수업하기 위해 공부를 하니 술술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대학에 와서 전공시간에 배우는 대부분이 이미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들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공부의 기본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이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만 열심히 들어도 특별한 사교육 없이 100점도 받을 수 있고,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학원 수업이 빌 때면 과제를 하거나 학교 홈페이지를 살펴보았는데 한 번은 ‘울산대학교 캐치프레이즈 공모전’이라는 배너를 발견했다. 울산대학교의 비전과 목표를 담은 캐치프레이즈를 공모한다는 것. 이 공모에 당선되면 1등은 상금 100만 원과 상장, 2등은 상금 50만 원과 상장을, 3등에게는 상금 30만 원과 상장을 주고 앞으로 울산대학교를 홍보하는 문구로 쓰인다는 것이었다.
‘어떤 아르바이트보다 낫다!’
그때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시급 18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5시간씩 30일 꼬박해도 27만 원밖에 벌지 못하는데 이건 시급 5000원, 아니 몇만 원짜리였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바는 글로벌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앞으로 성장해서 울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더 뻗어 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구로 갈까? 아니다. 세계로 가자!
“세계로 뻗어 나가는 세상의 중심, ○○대학교”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문구다. 한 5분 정도 생각하고 바로 공모전에 넣었다. 그리고 결과 발표일을 엄청 기다렸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던 몇만 원짜리 아르바이트가 어느 순간 국어국문학과의 명예를 건 문제로 커지고 있었다.
드디어 결과 발표일, 오후 늦게서야 공모전 당선자가 발표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1등과 2등은 없고 3등만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3등에 당선되었다. 학교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홍보 문구가 나오지 않아서 아마 1, 2등은 뽑지 않고 그래도 보내온 성의가 있으니 3등은 뽑아주겠다고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몇 등이든 어쩌랴.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결과 발표가 나고도 한참 동안 학교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난 당당하게 상과 상금을 받으러 갈 준비가 되어있는데.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학교 홍보실에 전화했다. 왜 시상식이나 그런 거 없냐고, 당돌하게도 말이다. 학교에서는 상금 30만 원을 나의 계좌로 보내주었다. 상장은 20년이 지난 아직도 소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