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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작가님 덕분입니다.

  일하면서 보람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돈을 많이 벌거나, 그 일로 인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게 되거나,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 그 보람은 더할 나위 없다. 나의 좌우명이 그러하다.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시간을 요즘은 100년 정도라고 한다. 얼핏 보면 100년이나 사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100년 중에 어리고 약해서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시간이 초소 10년, 학교에 다니느라 보내는 시간이 16년, 어학연수를 다녀오든 대학원이라도 간다 치면 다시 3~4년은 잡아먹고, 서른 살은 되어서야 진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하지만 사회생활도 만만치는 않아서 어리바리하면서 일을 배우고 익혀 가는데 몇 년을 보내고 이제 일도 할 만하고 자리도 잡으면 나이가 벌써 50~60대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의 삶의 노후를 준비하는 이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특히 최근에 치매 환자가 늘어나서 젊어서 고생하고 나이 들어서는 그 기억 속에 사는 모습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우리 할아버지도 치매를 몇 년이나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셨다. 기억 너머의 세상에서 누군가와 다른 삶을 살고 계신 듯한 모습으로.    


  나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나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허무하게 보내는 1시간이 억울하도록 싫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고, 수업시간을 쫙 당겨서 공강(비는 시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유의미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주변에 친구들은 공강이니 놀러 가고, 놀다 보니 수업을 들어가기 싫고, 그러니 점점 자신의 삶이 흐트러졌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면 돌아온 질문은 “너 돈 없어서 하는 거야?”였다. 돈 때문이면 돈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이렇게 다양한 일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뭐 하나라도 배우는 게 있지 않겠니?”    


  나는 늘 이런 마음으로 무엇이든 도전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서도 작가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보다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쭉 해오던 봉사 활동이라도 이어서 해보자 싶었다. 사실 봉사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나는 건강하니까 그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분들은 불편하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아주 거만한 생각.


그런데 봉사 활동을 하면 할수록 느낀 바가 있다. 나는 몸은 조금 더 건강한지 몰라도 마음은 저분들보다 건강하지 못하구나.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한 생각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이 느낌을 받으면서 조금은 겸손한 마음으로, 또 배우는 마음으로 봉사 활동을 다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그동안 해오던 봉사 활동과 다른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능기부’다. 재능기부는 음악이나, 그림이나 예체능을 하는 사람들만 가능하다는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한 장애인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혹시 우리 복지관에서 관보를 만들고 있는데, 교정 교열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정도면 충분히 해드릴 수 있다 싶어서 알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10년이 넘게 그 복지관의 관보 교정, 교열을 해주고 있다. 그런 인연을 시작으로 한 실버 복지관에서는 관보의 기획부터 주제 잡기, 목차 정하기, 내용, 퇴고, 교정, 교열까지 싹 다 맡겨서 그것도 재능기부로 몇 년째 하고 있다. 사실 책을 만드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다르다. 아직만 관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시작했지만, 처음엔 마음이 힘들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군데서 관보 교정이나 관보에 들어갈 글을 써달라고 하거나 관보에 들어갈 캘리그라피를 부탁하거나, 관보 특집을 쓴다며 기획을 부탁했다. 관보 전문 작가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 인연들이 맺어지니 복지관의 관장님들을 비롯한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에게 나는 구세주였다. 복지관에 갈 때면 나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무료 봉사라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내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역량을 가르쳐 주신 것이니 내가 더 감사하다.     


  나는 20대에는 ‘알바의 여왕’이었다면, 작가가 된 후에 ‘재능기부의 여왕’이 되었다. 누군가는 돈 받고 해야 할 일을 그렇게 재능기부를 해주니 돈을 못 버는 거라고 했지만, 돈을 받을 일이면 돈을 받는 것이고 내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그냥 기부만으로도 내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첫 다큐멘터리 ‘그린나래, 하늘을 날다’를 찍을 때도 아마 이런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물론 어렵겠지만, 물론 고비가 많겠지만 그분들이 이것을 계기로 조금이라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도 같이 희망을 느낄 수 있다면 절대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 그린나래 멤버들도 고생한 만큼 방송 후에도 보람을 먹고 산다.     

 나의 화려한 재능기부는 나의 이력보다 차고 넘친다. 내가 직접 낸 책보다 재능기부로 도와준 것들이 책이 된 경우는 엄청나게 많다. 나의 캘리그라피 작품들은 100회가 훌쩍 넘게 재능기부로 쓰여졌다. 그리고 정말 많이 들었던 말. 가슴 찡해지는 말.    


  “작가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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