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 가난을 고이 접어 3화

온천 마을

by 박병수

온천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사람이 늘 많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온천을 찾아왔다. 물에 몸을 담갔다가, 쇼핑을 하러 다녔다. 나는 거기서 건강식품을 팔았다. 친구가 소개해준 업체에서 인삼즙, 홍삼액, 관절에 좋다는 알약을 싸게 떼어 웃돈을 얹어 팔았다. 유통 과정은 잘 몰랐다. 그래도 친절함을 모토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비위를 맞춰주며 건강식품에 대해 아는 척을 해댔다. "효과 있다"며 여러 번 찾아오는 손님들이 생겼다. 하루에 몇십만 원씩 벌 때도 있었다. 그놈의 IMF 때문에 친구들이 퇴직할 때 우리 집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집에 가기 전 귤이나 통닭을 사도 부담 없었다. 생기는 돈은 바로 아내에게 가져다줬고, 감사해하며 받는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러다 『PD수첩』이 왔다. 카메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았다.

허가 없이 건강식품을 유통하는 업체를 촬영하던 중, 가장 최근에 납품받은 우리 가게를 알아내 찾아온 것이다. "허가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나는 PD의 질문에 얼버무렸다. 다른 장사꾼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방송이 나간 뒤 손님들이 줄었고, 가게는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작은 온천 동네에서 사기꾼으로 손가락질받기 시작하자 버텨낼 수가 없었다. 건강식품들은 집 창고에 쌓였고, 팔아 낼 방법이 없었다. 온천 주변을 돌다가 집에 빈손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아이들을 생각하자며 이사를 권했다. 화목했던 우리 가족은 정들었던 단독주택을 떠나 야반도주하듯 40분을 달려 세운빌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의 도움도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 듯 말이다. 쓰러질 듯한 세운빌라를 본 지혜와 지안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는 눈을 피했다. 그때부터 집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일을 잃고 집에 있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아내가 보험업을 시작했다. 늘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처음엔 잘돼는 듯했다. 보험 계약을 몇 개 해내고, 따로 돈이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집에서 밥을 짓고, 애들을 돌봤다. 지안이가 씻기 싫어하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혜가 방이 좁다고 투덜대면 웃으며 달랬다. 그러다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 늘어났다. 집은 시끄럽다며, 전화기를 들고나가 골목에서 통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쓰레기를 버리던 중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 보험 계약을 하는 통화가 아니라, 좋아하는 남자에게 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집에 들어와 정신없이 찾아본 아내의 핸드백에서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보고 싶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씨가 표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편의점에서 사 온 소주를 마시는 날이 늘어났다. 한 병이 금방 두병이 됐다. 아이들이 자고, 아내가 들어온 날 누구냐고 물었다. 아내는 고개를 저었지만, 미안하지 않은 태도에 더 화가 났다. 소리를 질렀다. 애들이 방에서 나왔다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다시 들어갔다. 술을 마실수록 머리가 멍했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버틸 수가 없어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첩첩산중이라 일자리가 없었는데, 일은 곱하기로 하고, 월급은 반절이라도 감사히 받겠다며 들어간 공장이었다. 아내와 대화하는 날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고 되뇌었다. 내가 무심하면, 아내가 조금 더 가정에 충실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공장에서 일이 끝나고 퇴근하면 매일 술을 마셨다. 다음 날 술이 깨지 않은 채 공장에서 용접을 했다. 그러던 중 기계에서 나온 불꽃에 한쪽 눈을 다쳤다. 용접은 배운 적도 없지만 할 줄 안다고 우기고 작업하던 중 발생한 큰 사고였다. 한쪽 시력이 흐려졌다. 안과에서는 일상생활은 가능하겠지만, 밝은 데서 활동하면 금방 피로해질 거라 경고했다. 그 경고를 받고 공장으로 갔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났다.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없었다.


술이 늘었다. 아침에도 마셨다. 애들이 학교 간 사이 빈 병이 굴러다녔다.

눈이 흐릿해도 술은 보였다.

아내가 떠난 날은 기억이 없다. 문이 열려 있고, 아내의 가방과 옷들이 모두 사라졌다.

지안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문 앞에서 물었다. "엄마 갔어?" 대답할 말이 마땅히 없었다.

술병을 다시 들었다. 손이 떨렸고, 온천 마을에서 웃던 날들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가 무거웠다. 이 어둠 속에서 나갈 수 있을까.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며 술병을 비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 가난을 고이 접어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