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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ly Pok 밀리폭 Mar 07. 2020

취직을 발목 잡은, 영어울렁증이 생기다.

징글징글 스노버리 영국 문화에 지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 내가 마나 영어를 못하는지 몰랐다. 미국과 호주에서  1년씩 일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한국에서 외국인과 근무했기 때문이다. 영어 커뮤니테이션과 영문서류작성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했을 , 바로 취직될  알았다. 그런데 10  미국에서도 없었던 ‘영어 울렁증 생겼고, 마음의 병이 심해져 한동안 구직포기자로 살았다. 끝없이 사색하며 세상에 나가는  두려워 나만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영국은 아직 계급사회인게 분명하다. 내가 “Hello.”라는  마디를 내뱉음과 동시에 나의 발음, 억양을 분석하고 나의 , 몸짓 하나하나가 필터링되어 편견으로 뭉친 ‘나의 인격 정해지는 기분이랄까? Snobs! 속물들에게 둘러싸인  같은 기분이 나를 견딜  없게 만들었고, 끝없는 무시 속에 자신감을 잃었으며, 결국 영어를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은행 계좌를 틀기까지  번이나 튕긴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년에  천명, 조건이 되는 청년에게 워킹홀리데이 격인 영국 YMS 비자를 내주는데 그걸로 신분을 증명하기엔 부족한 모양이었다. 보증된 비자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만으로는 한동안 은행계좌를 만들 수가 없었다. 취직증빙서류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다는 , 학교 등록은 6개월 이상 장기 학생만 가능하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튕겼다. 인터넷찾아보니 8번도 넘게 거절당한 사례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약과였다. 하지만 이런 작은 사건들이 모여 삶을 불안하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은행 계좌 하나 만드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번째 은행 예약 일정을 잡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명품이란 것을 사봤다. 아웃렛에 가서 할인가로 백만 원이 넘는 몽클레(MONCLER) 코트를 샀다. 그러고도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가방, 신발을 갖춰신고 풀메이크업에 머리도 성심성의껏 만져서 은행에 방문했다. 조금이라도 고급진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악센트에 유의하며  문장을 달달 외워갔고,  우아한 미소를 띠고 여유 있는 표정을 연기하며 당당하게 걸었다. 담당자가 필리피나였는데, 은행계좌 틀면서 나란 사람을 파악할  있는 스몰토크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국인인  알고 ‘산다라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 얼마나 충실히 리엑션을 했던지... 나의 노고의 결과로써,  개월 만에 은행 계좌를 만들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새삼 한국에서는 머리도  감은 떡진 머리에 주민등록증 하나면 계좌를 만들  있는 신분이라는  감사해지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거지만 영국에서는 시민권자가 되어도 직업이나 보증할만한 것이 없으면 은행계좌를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일을  내역이 확인되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큰돈을 입금하려고 해도 어디서  현금인지 증빙서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신용카드 만드는 것보다 힘든  같다.

 나는 책상머리에서 하는 공부에는  소질이 없어서 영어고자인 상태로 미국에 가서 귀로 영어를 익혔다.(in 2008) 주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남미, 일본, 중국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잘못된 문장도 많이 사용하고 슬랭도 많았다. 뜻은 통하지만   나는, 정확하지 않은 영어라고 하면 되겠다. 하지만 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철판깔고 얘기하는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까지는...

 어렴풋 하지만, 영어울렁증이 심해진 계기로는 ‘버스정류장사건이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버스정류장에서 말끔히 차려입은 여사님이 매우 정중하게 다가와, “Excuse me, 혹시 ㅇㅇ으로 가는 버스  번인  알아요?”라고 물었다. 당시 영어울렁증 초기단계였던 나는 동공 지진이 일어났고,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 ... 모르지만 내겐 ... map 어플이 있어! ...으로 찾아줄게.” 이런 뉘앙스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면서 매몰차게 비웃는 말투로 “ 영어 못하는구나!” 하고 벌레 보듯이 나로부터  미터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황당함 뒤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영어를 못하지 바보냐고... 등신 취급을 받은  같아 슬펐다가 화가 났다가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미국, 호주에서 인종차별  당해본  아니었다. 마약하고  마신 십대들이 조롱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상처가 되지 않았던  그들이 미친놈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욕하는데 거기에 상처받으면 내가 손해니까, 그냥 ‘ 밟았구나!’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내가 말을 하고 행동을  때마다 현지인에게 평가받는  기분은 누가 말을  때마다 체한  같고 가슴이 콩닥거리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백수인 동안  일상은 GYM에서 운동하고, 바로 위층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대부분 체육관과 도서관이 붙어 있다.) 날씨 좋은 날엔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녔다.  트라우마가 심해진  다른 계기는 도서관인  같다. 평일 대낮 공공 도서관은 노숙자와 백수들의 집결지이다. 단골을 매일 보니,    마주치다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미저리가 되는  같았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돈이 있냐거나,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종교의 포교 활동 그리고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하는 듯하더니 당당하게 물을 가져오라는  노예처럼 부리거나, 가장 최악은 ‘sweet papa’ 프래임으로 작업 거는 ‘cat calling’이었다!   당하고선 길을  때도, 마트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절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게 되었다. 영어울렁증은 대인기피증으로 진화했다. 편견이 생겼고 확신이  되고 그리고 미소를 잃어버렸다. 미소  상냥한 표정은 쉽게 다가와서  걸기 좋은 인상이기 때문이다. 평소 웃음이 넘치고 푼수 때기에 가까운 나였는데, 일부러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니 그만큼 삶이 고단해졌다.

  무엇보다 미소를 띠며 말을 거는 정중한 사람에게까지도 학을 때게  계기가 있다. 벌건 대낮에 친구가  앞까지 차로 태워주었는데 그걸 보고 어떤 신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굉장히 온화한 미소로 다가와 스몰토크를 시작하더니 방금 차를 태워준 사람이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그럼 남자친구가 있냐며 자기도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서 2:2 같이 섹스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제안을 했다. 얼마나 젠틀하게 물어보던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이런 미친놈이 이런 기막힌 이유로 나에게 말을 걸다니화낼 용기도 없이 거절하고 집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울컥했다. 그런 몹쓸 말을 듣고 정색도 못했다. 황당하고 화가 나고  슬퍼졌다.  행색이 그렇게  제안해도   같고 추레한가… London NW3 이면 굉장히 좋은 동네에 속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 이로써 모르는 사람이라면 친절한 사람마저 상대하기 싫어지게 되었다.  누구든 무슨 용건이든 함부로 나에게 말을 건다는  자체에 거부감이 생겼다. 대인기피증은 심해져만 갔다.

 그런 내가 어떻게 영어울렁증을 극복하게 되었을까? 취직과 함께 곧 사라졌다!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배려받으니 안정을 찾았다. 그럼 어떻게 취직했을까? 그렁그렁한 눈을 본 인사 담당자가 나의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였달까? 다음번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취직 여정기 편을 올려야겠다.


스포 한 줄: 취직하게 된 계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는 “담배 덕분이요.”라고 대답하겠다.

손뼉 딱 치게되는, 영국인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책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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