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시즌1] 2장. 로비스트 공화국

누가 기준을 정하는가

by 밀리폭

허미래는

“권력”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건

권력이 아니라

기준이에요.”


나는 처음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는 법을 만들고,

법은 사회를 움직인다.

그게 우리가 배워온 질서였다.


그러나 허미래가 말한 기준은

법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합리적인지,

무엇이 현실적인지,

어디까지가 무리한 요구인지를

미리 정해버리는 힘.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가

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죠.”



1. 가장 저항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결정


“로비는

항상

가장 저항하기 어려운 곳에서

먼저 작동합니다.”


허미래가 처음 꺼낸 예시는

총도, 석유도 아니었다.


급식이었다.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음식은

아이들의 식탁에 먼저 올라와요.”


그 변화는

기득권의 힘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행정 용어 속에서 시작됐다.


예산 효율화.

공급 안정성.

인력 절감.


회의실에서 반복된 기준은

영양이 아니라

관리 가능성이었다.


가격 변동이 적을 것.

대량 공급이 가능할 것.

보관이 쉬울 것.

조리 시간이 짧을 것.


그 기준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것은

늘 같은 종류의 식품이었다.


가공식품과 즉석식,

설탕과 전분이 많은 메뉴들.


“아무도

아이들에게 나쁜 걸 먹이자고

말하지 않아요.”


허미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정책을 설계할 때

아이들의 몸이 아니라

시스템의 편의를

먼저 보게 될 뿐이죠.”


영양사의 발언은 점점 짧아졌고,

행정은 예산표를 더 오래 들여다봤으며,

식품 산업을 대표하는 단체들은

‘현실적인 선택’을 강조했다.


“이건

음모가 아니라

구조예요.”



2. 쓰레기를 줄이자는 말, 그리고 다시 바뀐 기준


“같은 일이

플라스틱에서도 반복됐습니다.”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규제가 논의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시행되었다.


비닐봉지,

과도한 포장재,

일회용 컵과 접시.


규제가 도입된 뒤

거리는 깨끗해졌고,

하수구 막힘은 줄었으며,

도시 미관도 개선됐다.


그러나 곧

다른 언어가 등장했다.


생활필수품인데 규제하면 불편하다.

대체재가 충분하지 않다.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한다.


“흥미로운 건

그 누구도

환경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허미래는 말했다.


“다만 이렇게 말했죠.

‘지금은 무리하다.’”


그 말은

규제를 뒤집지 않았다.


대신

규제의 속도와 범위를 바꾸었다.


전면 금지는 예외 조항으로,

과금은 유예로,

‘재활용 가능’이라는 단서로.


“그 단서가

얼마나 많은 걸 허용하는지

아시나요?”


이론적으로만 재활용 가능한

수많은 플라스틱이

그 기준 아래 살아남았다.


이 쓰레기는

개인의 무책임이 남긴 흔적이 아니었다.


생산을 멈추지 않기 위해,

책임을 나누지 않기 위해,

자본이 설계한

시스템의 결과였다.


환경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정책의 중심 질문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이게 옳은가가 아니라

지금 감당할 수있는가로.



3. 생활 인프라가 된 일회용품


현미리는

미국의 마트 입구를 떠올렸다.


포장된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

일회용 접시와 컵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특히 할로윈과 크리스마스 같은 시즌에는

테마별 포장으로

더 넘쳐났다.


“오래 쓸 그릇이나

스테인리스 포크와 나이프보다

일회용 용기가

먼저 선택되는 곳이었어요.”


한국이었다면

이런 진열은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규제가 나오기 전에

여론이 먼저 움직였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때 허미래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건

시민 의식의 차이가 아니에요.”


“기준이

어디에 놓였는지의 차이죠.”


이 사회에서

일회용품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생활 인프라였다.


그 기준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힘은

석유와 화학 산업,

그리고 포장·유통 산업이었다.


플라스틱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편의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4. 로비는 반대하지 않는다


허미래는 말했다.


“로비는

무엇에 반대하지 않아요.”


대신

정책이 던지는 질문을 바꾼다.


보호할 것인가 → 관리할 수 있는가

줄일 것인가 → 단계적으로 가능한가

책임질 것인가 →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그렇게 기준이 바뀌면,

정치는 그 안에서만 움직인다.


아이들의 식탁이 가벼워진 것도,

플라스틱이 줄지 않는 것도,

모두

‘현실적인 결정’의 결과였다.



5. 가장 잘 알려진 예시


“그리고 물론,

총기도 있죠.”


총기 산업은

이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로비스트 중 하나였다.


그들은

폭력을 말하지 않았다.


자유를 말했고,

권리를 말했으며,

헌법을 이야기했다.


“방식은 달라도

구조는 같습니다.”


허미래는 조용히 말했다.


“로비스트 공화국은

특정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 그 자체예요.”


그리고 어떤 기준은

폭력보다 훨씬 조용하게,

훨씬 많은 사람을 무너뜨렸다.



6. 치료라는 이름으로 설계된 기준


허미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른 예시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가 된 분야가 있어요.”


그녀는

‘제약’이라고 적었다.


“이건

총기보다

훨씬 조용했고,

플라스틱보다

훨씬 늦게 문제로 인식됐죠.”


처음에는

모두가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


통증을 줄이자.

환자를 편하게 하자.

삶의 질을 높이자.


“문제는

여기서도

기준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허미래는 말했다.


“치료가 필요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쉽게 처방할 수 있는가로요.”


회의실에서

기준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의사가 설명하기 쉬울 것

환자가 즉각 효과를 느낄 것

보험 청구가 간편할 것

장기 처방이 가능할 것


“중독 가능성은

‘관리 가능하다’는 문장으로

대체됐죠.”


그 기준을

가장 잘 충족한 것은

강력한 진통제였다.


“아무도

중독을 권하지 않았어요.”


허미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만

통증을 빨리 없애는 게

환자 중심이라는 기준이

반복해서 선택됐을 뿐이죠.”


제약회사는

통증을 수치로 바꾸었고,

통증이 일정 수치 이상이면

강한 약을 쓰는 것이

‘표준 진료’가 되었다.


그 표준은

법이 아니었지만,

법보다 강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이한결이

조용히 말했다.


“…오피오이드 위기.”


허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펜타닐이었죠.”


처방 약은

불법 시장으로 흘러갔고,

치료는

의존으로 바뀌었으며,

의존은

질서의 문제로 번졌다.


“이건

의사의 도덕 실패도,

환자의 선택 실패도 아니에요.”


허미래는 분명하게 말했다.


“제약 로비는

약을 팔기 위해

사람을 속이지 않았어요.

대신

‘치료의 기준’을 바꿨죠.”


통증은

없애야 할 것이 되었고,

참는 것은

비합리적인 선택이 되었으며,

약을 줄이는 의사는

‘비인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중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산물이 됩니다.”


허미래는

이야기를

여기서 멈췄다.


“그래서

이건

의료 문제로 끝나지 않아요.”


허미래는

노트를 덮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사회는

이렇게 결론 내렸어요.

로비를 없앨 수 없다면,

로비가 작동하는

힘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7. 증언 2 – 로비의 무게를 바꾸는 방식, 공동기여 계정 (Common Contribution Account)


“제가 다녀온 사회에서는

로비를 금지하지 않았어요.”


허미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 활발해졌죠.”


대신

로비의 무게를 바꿨다.


기본소득은

개인 지갑으로 끝나는 돈이 아니었다.


지급되는 순간부터

일정 비율은

‘공동기여 계정’으로

분리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10%는

공동기여계정으로 설정돼요.”


이한결이 바로 물었다.


“자동으로요?”


“네. 그중 9%는

개인이 선택하죠.

뭐든지 있어요.”


국가가 공신한 목록 안에서

사람들은

매달 자신이 지지할 영역을 고른다.


동물권단체,

중증외상센터,

예술인복지재단,

R&D,

마을버스 환승제 지원 등...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기부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를 '공동기여 시스템' 제도 안에 넣되,

방향은 시민이 고르는 방식.


허미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로비스트 공화국을 바꾸는 건

로비를 없애는 게 아니라,

로비할 수 있는 힘의 주체를 바꾸는 일이에요.”


시민은

의견이 아니라

자원을 통해

정책에 참여했다.


그 경험은

이 감각을 남겼다.


나는

이 사회의 우선순위에

실제로 관여하고 있다.



8. 기준이 먼저 무너진 사회


허미래는

해법의 일부만 꺼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법과 규범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권력이 지금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질서는

가장 먼저 흔들린다.


그리고

그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로비스트 공화국은

총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준을 바꾸며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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