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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Jun 07. 2018

남산을 오르며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       


아침 다섯 시면 으레 TV에서 애국가와 함께 보여주는 그 남산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자 오늘 가족과 함께 발길을 옮겼다.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이 기초하고 재건하며 만들었다는 남산 성곽을 따라 장충동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수많은 돌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며 튼튼히 쌓인 성벽은 몇백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기에 오늘 우리가 감사하게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팔각정 주변 남산 일대는 인파로 가득했다. 타워 전망대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아랫녘 동서남북에 위치한 서울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구릉 밑에 형성된 수평의 분지와 그 안에 비좁게 밀집한 수직의 대형빌딩 군락이 조화를 이룬 서울 도심의 경관은 참으로 웅장했다. 이 도심 한가운데에 자연의 고즈넉함을 품은 채 우뚝 솟은 이곳 남산은 서울의 상징이며 시민의 쾌적한 휴식처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의 희로애락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근 사십여 년 전 어느 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남산을 찾은 적이 있다. 남산 기슭 한 모퉁이에 주저앉아 울먹이던 내 모습이 지난 세월의 그림자가 되어 그곳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저녁때만 되면 TV 앞으로 바싹 다가가서 화면을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고 시력에 문제가 있는가 하여 안과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내린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큰 아이는 근시가 너무 심하니 초록빛 나무가 울창한 강원도 산골에 보내면 좋겠다고 했고, 작은 아이는 적록색맹 증상이 있으니 커서 의학이나 미술 분야 전공은 고려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지금이야 근시는 렌즈 착용이나 라식수술로 손쉽게 교정되고 색맹은 전공 선택에 큰 장애가 되지 않으나, 당시는 그런 기술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학 입학은 엄격한 신체검사 기준을 통과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부터 우리 집은 비상이 걸렸다. 한참 피아노 연주에 흥미를 더해가던 큰아들의 레슨은 어렵사리 중단시켰지만, 유아기 때부터 종이만 보면 색연필을 쥐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이었던 작은 아들은 장래 화가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난감했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소질을 살려 미술 분야의 길을 가는데 부모의 역할을 다 하고자 했는데, 그날 의사의 말 한마디에 두 아들의 장래는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두 아들의 눈 보호를 위한 치료 방법을 찾아 본격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근시 교정 학원에 매일 다니게 했고, 시신경을 발달시킨다는 초록색 화초를 거실이며 베란다에 가득 채우고는 틈만 나면 쳐다보라고 애타게 종용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눈을 밝게 해준다는 생선 눈만을 골라 사서 조리해 먹이며 시력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용두동에 용한 색맹 치료사가 있다 하여 작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았고, 수소문 끝에 알아낸 일본 오사카의 색맹 전문 치료원에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원정 치료를 다녔다. 두 아들의 눈에 비치는 모든 물체가 밝고 선명하게 보이기를 소망하며 절절한 마음으로 치료에 임했다. 하지만 그 많은 날의 정성은 그다지 효험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 두 아들의 성장 과정에서 눈 때문에 발생한 큰 불이익은 없었고 본인들의 진로에도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작은 아이는 회화와 조경학을 복수 전공하여 녹색 식물을 다루는 조경전문가가 되었고, 비록 피아노 전공은 하지 않았으나 음악 애호가가 된 큰아들은 경영학 분야의 교수가 되어 열심히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고 있다. 두 아들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눈으로 인한 더 큰 시련을 크게 겪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안과 의사의 선언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쓸쓸히 발길을 옮기던 그 날, 무거운 고뇌에 짓눌려 움츠러든 나의 가슴을 다스려주고 따뜻하게 상처를 어루만져준 고마운 이곳 남산. 남산의 푸른 바람을 맞으며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던 그때의 내 모습을 꺼내보니 새옹지마 같은 인간사가 한 토막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남산은 이 긴 세월 동안 깎여 부서지지 않고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니 감겨오는 회상에 더욱 사무친다. 지금도 남산의 쉼터에 앉으면 소나무 잎이 날라다 주는 바람 소리에서 그 날의 훌쩍임을 듣는다.         

 

남산은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환을 품고 있었을까. 그들의 아픈 가슴을 달래주며 묵묵히 서 있는 저 늘 푸른 소나무. 그 꿋꿋한 기상으로 모든 이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주는 만고상청(萬古常靑) 명의(名醫) 남산. 철갑을 두른 듯 세차고 푸른 정기의 남산은 초라한 우리를 언제까지나 자애로운 눈으로 지켜봐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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