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경춘선이 막 개통되어 춘천에 전례 없이 관광객이 몰릴 때였다. 구정 설 연휴에 작은아들이 춘천에 사는 친구에게 간다고 해서 우리 부부도 새 열차를 타볼 겸 따라나섰다.
쾌적한 고속철을 타고 춘천역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춘천의 자랑 소양강 댐을 보기 위해 택시로 이동했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이 흙을 이용한 공법으로 쌓은 이 댐은 당시 동양 최대의 다목적 사력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댐으로 인해 반쪽 호수가 되어버린 소양강은 어쩐지 활기를 잃은 듯 초라해 보였다. 그 넓은 강을 가로질러 막아놓지 않았더라면 자유로이 물결 춤추며 흘러가는 아름다운 호수가 되었을 텐데.
친구를 만나고 온 아들이 소양호 너머 청평사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소양호 선착장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청평사행 여객선이 정박해 있었다. 이 자그마한 배는 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느라 지쳐서인지 선체도 선실 내부도 많이 낡아 있었다. 성한 의자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나마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구명복이 위안을 주었다.
고려 시대 사찰인 청평사는 높은 지대에 있어서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높은 언덕길 산행을 힘들어하는 남편은 계속 뒤처졌다. 마침 오르막길 중간쯤에 한 꼬부랑 할머니가 운영하는 천막 식당이 있어서 남편은 그곳에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쉬기로 했고, 나와 아들은 절 경내를 구경하고 내려오기로 했다. 아들은 계곡을 오르며 청평사에 얽힌 전설인 당나라 공주와 상사 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곡 옆에는 설화의 주인공인 공주의 조각상이 있어 함께 사진도 찍었다. 청평사 바로 앞까지 다달았으나 승선 시간이 촉박해 대웅전은 들어가지 못하고 바삐 내려왔다. 할머니 포차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만나 우리도 어묵과 막걸리로 대강 허기를 때우고 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탔다.
배에서 내린 뒤 아들 친구가 우리를 위해 예약해 놓았다는 맛집으로 가서 춘천의 별미 닭갈비와 막국수를 주문했다. 집주인 할머니의 아드님이라는 분이 워낙 기분 좋게 접대해주어서 더욱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분은 친구의 부탁이었다면서 굳이 음식값 받기를 사양하였다.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콜택시를 타고 춘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언덕배기 위의 카페로 향했다.
택시가 목적지에 거의 왔을 즈음, 갑자기 아들이 자신이 들고 다니던 가방이 없어졌다며 당황해했다. 오늘 들렸던 곳 어딘가에 놓고 온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지갑과 핸드폰, 카메라 등 중요 물품은 외투 주머니 속에 넣어서 괜찮았지만, 가장 애지중지 여기는 물건이 그 가방 안에 있었다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사각형의 작은 스케치북이었다.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가는 아담한 크기의 이 스케치북은 내가 지난여름 라오스 여행 중 길거리 상점에서 사서 아들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아들은 어딜 가든 항상 이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시선 안에 들어오는 사람과 풍경을 그 자리에서 펜을 꺼내 스케치하곤 했다. 스케치북 페이지를 열면 여러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 생생히 그려져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는데, 이제 더는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속이 상했다. 무엇보다 애정 어린 물품을 잃어버린 아들의 상심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작은아들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대학에서 미술 전공을 했다. 중간에 조경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지금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어딜 가든 스케치북에 사생하는 습관만은 여전했다. 엊그제 설날 아침에 그린 할머니의 옆모습도 그분의 잔잔한 미소가 어찌나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는지, 그걸 본 친척들 모두가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 소중한 그림까지 함께 사라졌으니 아들이나 나나 착잡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스케치북에는 내 얼굴 모습도 많이 있어서 언젠가 이 그림들을 모아 ‘엄마 얼굴 전시회’를 열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도 했는데, 이제 모두 물 건너간 일이 되었으니 참으로 애통했다. 들어있는 물건이라고는 안경과 손 장갑과 스케치북뿐인 그 가방을 어느 선량한 분이 습득했다면 어서 주인을 찾아 줄 수 있겠건만.
춘천 교통방송국에 분실 방송을 문의해 보라는 택시기사님의 말씀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전화 예약접수도 했다. 가족 모두 여유로운 모습이 아닌 침울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아들은 곧바로 방에 들어가 앉아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두고 왔을 만한 장소를 여기저기 추적해 보았다. 청평사를 오갔던 여객선, 산에 올라가는 길에 들렀던 화장실, 청평사 입구 옆 관리사무실, 꼬부랑 할머니의 천막 식당, 닭갈비집, 택시 앞자리…. 그중 어디 한 군데에 가방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확신이 꼭 현실과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한참 동안 인터넷과 씨름하던 아들은 드디어 꼬부랑 할머니 음식점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번호를 찍으니 다행히 할머니께서 직접 전화를 받으셨다. 저녁에 식당 문을 닫으면서 뭔가를 발견했는데 버리지는 않았다고 하시더란다. 연로하신 할머니 라선 지 그 물건이 가방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다고 한다. 한참 초조함으로 달궈진 아들과 나의 가슴은 그 반가운 소식에 그대로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들의 가방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춘천 교통방송국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춘천으로 다시 가겠다면서 서둘러 잠을 청했고, 나도 아들이 불 끄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아들을 깨웠다. 8시였다. 부리나케 집을 떠난 아들로부터 9시쯤 춘천행 버스에 올랐다는 연락이 왔다. 혹시 잃은 물건을 찾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는 말라고 안심시켰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스케치북은 너와 인연이 없는 것이니 빨리 잊으라고 당부했다.
오전 내내 집에서 할 일을 하면서도 시계를 흘끔흘끔 들여다보았다. 우리 아들이 지금쯤 고속버스에서 내려 소양강 댐으로 가는 택시를 탔겠지. 이 시간이면 이미 청평사로 가는 배를 탔을까? 그 꼬부랑 할머니 식당은 뱃터에서 내려서 꽤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지금 어디쯤 가고 있으려나. 시곗바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스케치북은 잃어버리기에 너무나 아까운 보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들의 상심이 너무나 커 보여 가슴이 아팠다. 만약 찾지 못하면 실망과 자괴감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을 것 같은 우려가 이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아들의 마음을 마냥 달래줄 수만도 없는 엄마의 괴로움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이 일로 인해 아들이 줄곧 침울한 모습으로 지낸다면 아들과 나 모두 힘들 것만 같았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스케치북을 꼭 찾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아들의 헝클어진 마음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꼭 찾을 거야. 암, 그래야지.
따르릉 전화가 왔다. 아들인가 보다.
“엄마, 찾았어요.”
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행운의 날. 오늘같이 기분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우리 아들 장하다. 그 끈기로, 그 열정과 노력으로 찾아냈구나. 그 같은 도전 정신이 너의 앞날을 열어줄 것이다.
축하한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