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어휴, 어쩜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슬쩍 웃으며 말하는 30대 주부, 그분의 이름은 ‘초롱이’이다.
아니, 두 이름 모두 그 밥에 그 나물이잖아? 옆 사람이 거든다.
70년대 즈음, 한글 이름 짓기가 전국적으로 번지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이어져오고 있지만, 당시에는 새로 태어난 남아 여아에게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대부분 우리말 고유의 정취를 담은 낱말에 연유하여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은 이름을 선호했다. 그 시기에 태어난 분들의 이름 중에는 듣기에 편안하고 부를 때도 친근감을 주는 것이 많았다. 근래 들어서는 감성이 충만한 의미를 담은 한글 이름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특히 여아인 경우, 물보라, 해솔, 흰가람, 예슬 같이 순수한 정서가 표현된 이름을 들으면 마치 밝은 빛 누리에서 맑게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마냥 친근하게 가슴에 안긴다.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중에 유독 인간만이 이름을 가지고 소통을 한다. 이름은 시대에 따라 사람 따라 각양각색이지만,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기표로서 평생 불리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어 신중하게 지어야 한다. 자아와 동일시되는 이름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기에 깊은 의미와 좋은 어감을 가진 어휘에서 자연스럽게 가려낸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름과 운명과의 상생관계를 연구하여 성명 철학의 지평을 열기도 했다. 가문을 중시하는 씨족사회의 전통에서 형성된 돌림자 이름 짓기는 주로 한자의 뜻과 음이 조화롭게 균형 잡힌 작명법을 택했다. 반면 내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집안에서는 나름대로 쉽게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을 지어 썼다. 내가 어렸을 때 들어본 이름 중에는 칠석이, 용팔이, 순분이, 든든이 등,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름이 많았다. 이들 중 대다수는 성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감을 느끼며 개명을 하기도 했다. 이름에 있어 발음이 주는 어감의 효과는 필요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름으로 인해 행과 불행이 갈리며 운명이 좌우된다고도 하니, 작명은 곧 그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아닌가 한다.
인생에 어떤 목표를 설정하며 밝은 미래를 향한 소명을 담고 운명론적 이름을 짓기도 한다. 딸이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영’이라고 지은 아버지가 있는가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얻은 소중한 딸이기에 신앙심을 돈독히 하라는 사명감으로 ‘하영’(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지었다는 분도 있다. 과연 앞으로 그 여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의 소중한 의미를 충실히 이행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오직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이름 짓기에 정성을 다한 부모의 마음만은 숭고하기 그지없다.
오래전 화제가 되었던 이름 중에 ‘박차고나온노미새미나’ 가 있다. 이 이름이 처음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큰 뜻을 품으라고 이토록 긴 이름을 지었을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다 성장해서 가정을 이루었을 이 이름의 주인공이 과연 지금도 같은 이름을 고수하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최근 이분이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동안 이름 때문에 큰 불편을 겪은 적도 없고 딱히 개명할 생각도 없었다며 웃으면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현재 한 제약회사의 연구소에서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아마 부모의 희망과 기원이 한껏 담긴 이름 덕에 인생길이 잘 펼져진 모양이다.
며칠 전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서 둘째 딸아이를 출산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우리 김 씨 가문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손녀이기에 가족 모두가 기쁨에 넘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사실 아기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온 식구가 아기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많은 고심을 했다.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아무래도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계속 살아야 하니 이름을 현지화하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만 한국어와 영어의 두 언어로 동시에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부드러운 발음의 이름 이어야만 했다.
세계가 하나 되어 모든 사람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된 지금,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와 영미권 까지도 함께 통용되는 이름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는 이름은 한 언어권에서만 특정하게 사용되는 음과 결합되지 않아서 어떤 언어로 불리던 유사한 발음으로 들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리 둘째 손녀의 이름도 처음엔 그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발음 정도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름 짓기에 대한 고민은 점점 늘어갔다. 이국적이며 흔하지 않고, 깊은 뜻과 고전적 느낌을 주며 영어의 엑센트가 강하지 않은 이름을 골라야 했다.
이 모두를 포함하며 순하게 와 닿는 음을 찾다가 ‘단아’라는 이름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모여서 만장일치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결국 언니 이름 ‘린아’와 돌림자가 된 것이다. 이름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 보았다. 단아’는 서구 신화에서 풍요의 여신을 지칭하고, 중동에서는 아름다운 진주를 뜻한다고 한다. 어느 문서에는 총명하고 순결한 사람, 신의 어머니라 적혀 있었다. 우리식 뜻글 한자 이름도 생각해야 했기에 작명소에 의뢰를 했다. 주역으로 본 한자 단아(緞芽) 이름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지모(智謀)가 출중하고 재주와 덕성을 겸비한 고고한 인격을 갖춘 영도자의 상(像)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었다.
우리 모두의 머리와 가슴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물 중에 오직 사람에게만 찍힌 이 이름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는 인증서이기에 이름 앞에서는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름값을 한다’ 라는 생활 속의 교훈처럼,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만사를 소홀함 없이 신중하게 처신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키워가야 한다. 우리 손녀딸 ‘단아’가 새롭고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완성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자신에게 펼쳐진 여러 갈래의 길을 잘 선택하고 닦아서 모든 사람들의기억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란다.
깊은 뜻에 듣기 편하면서 부르기 좋도록 온가족이 합심해서 지은 이름 ‘단아’가 먼 훗날 됨됨이가 출중한 사람으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해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