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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Jun 07. 2018

고향은 어디에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시인 이은상 님이 그분의 고향 남쪽 바다를 보며 읊은 시 ‘가고파’ 이건만, 나는 이 시를 대할 때마다, 이 가곡을 부를 때마다 서해안 내 고향 앞바다가 눈에 어리어 사무치는 그리움에 지그시 눈을 감는다.


‘사람은 태어나면 도시로, 소는 낳아서 시골(농촌)로’라는 지론을 가진 아버지의 교육 방침으로 우리 9남매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도시 학교로 전학해 오면서 타향살이에 익숙해져 살아온 나이지만, 고향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음은 어느새 전원 교향곡의 선율에 실려 고향집 앞마당에 서 있다.     


학교가 방학을 하면 하루도 늦추지 않고 고향집으로 달려갔지만, 봄, 여름, 겨울 방학에만 드나드는 고향 나그네였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형제 중 여덟 번째, 딸로서는 다섯째인 나는 늘 큰 언니 오빠들의 지시와 분부를 받아야 했다. 방학 때 오랜만에 고향 집에 와서도 맘껏 놀지 못하고 심부름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여름 방학인 음력 6, 7월경은 한창 일손이 바쁜 농번기이다. 농사터가 많은 부농인 우리 집은 두세 명의 상주하는 머슴 외에 매일 품삯을 받는 삯 일꾼들에게 제공할 새참과 먹을거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집안 안팎을 빠른 걸음으로 드나드는 아낙네의 손에는 어머니께서 정한 그날의 식사 메뉴가 들려있었다. 수십 명의 일꾼들이 논일 밭일을 하는 날이면 집에서 한참 멀리에 있는 논밭으로 준비한 점심밥을 들고 가야 한다. 아저씨는 등에 지게를 지고 아주머니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그 먼 곳까지 음식을 날랐다. 놀기만 할 수 없는 우리들도 물주전자나 막걸리 통을 들고 일렬로 줄지어가는 아주머니들 뒤를 따라갔다.


여러 곳에 농사터가 많았지만 나는 ‘밀무시’라는 이름을 가진 바닷가 옆에 위치한 논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 이름을 잊지 못해 지금 내가 쓰는 이메일 아이디도 ‘밀무스’(milmus)이다. 한 시간 남짓 걷는 논두렁을 시원한 푸른 물결과 넘실대는 파도를 보면서 가노라면 무거운 물주전자의 무게도 잊곤 했다.    

  

명사십리를 연상케 하는 길게 펼쳐진 모래길, 백사장 따라 곱게 핀 해당화 꽃내음이 실바람 타고 날아온다. 언니와 나는 가시에 찔리면서 해당화 꽃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옷깃에 달고는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풀밭에 차려진 일꾼들의 점심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빈 그릇 몇 개를 들고는 바다 쪽으로 향한다. 모래사장을 걷다가 하얀 타래실 모양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밀려오는 파도 줄에 줄넘기를 하면서 목청껏 노래도 부른다. 떼 지어 날아드는 갈매기에게 두 팔 벌려 날갯짓을 하면 금방 갈매기와 친구가 된다. 시간을 잊은 채 실컷 놀이에 열중하다가 집에 늦게 가서는 으레 꾸중을 듣는다. 그 즐거운 야외 고향의 야외무대를 뒤로 하고 우리는 또 외지의 도시 학교를 향해 떠나야 한다.


 겨울 방학에 내려와서도 눈치껏 일을 도와야 했다. 식구가 많은 우리 집은 식사 때가 되면 더욱 분주했다. 내가 담당하는 일은 부엌에서 큰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용광로처럼 달구어진 아궁이 속의 뜨거운 열기로 가마솥 밥이 익어간다. 불을 때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대문 밖 앞마당에 나와 선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땀 배인 내 얼굴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동네 마을 넘어 곧바로 펼쳐지는 널따란 해변이 눈 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보이고 그 앞에 아주 작은 물체가 느리게 움직인다. 인천을 향해 저어 가는 똑닥선이다. 할아버지는 매일 오전 오후 바다의 한 지점을 지나가는 똑대기(똑딱선)를 보고 하루의 시간을 가늠하면서 시계가 없어도 우리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셨다. 여름이면 가끔 “갯물은 피부병에 좋은 거야.” 라며 밀물이 찰랑일 때 바다 끝자락 모래 맡에 고인 물길에 앉아서 웃저고리를 벗고 등멱을 즐기곤 하셨다.


 나의 유년시절은 고향의 진한 바다 냄새가 배어 있다. 어릴 때부터 갯벌 놀이터에서 손발 적시며 자란 나는 바다와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 썰물일 때는 갯벌에서 조개와 집게 게, 황발이, 능쟁이를 잡았다. 소스라쳐 놀라 도망가는 게들의 날랜 동작에 몇 마리 잡지도 못하면서 얼굴에는 온통 개흙으로 분칠 하면서 즐거웠다. 만조가 되어 해면에 밀물이 가득 찰 때는 큰 구럭(망태기)을 들고 낚시하러 가는 오빠 뒤를 졸랑졸랑 따라나섰다. 망둥이 낚시의 어획량이 많아 풍어일 때는 즐거운 비명을 올리며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여름방학, 날씨 좋은 날 저녁이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러 바닷가로 향했다. 모래사장에 모닥불 피워 놓고 동네 형 누나 모두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 놀이에 밤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목청 돋우어 노래도 불렀다. 토셀리의 세레나데, 바위고개, 가고파는 우리의 18번, 그 힘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리 동네 합창단인 언니 오빠 친구들이었다. 아직도 그들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한데….  그 고운 시절 뒤로한 지금은, 아득히 멀어져 간 기억의 저편 어디에서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고 있을까. 저 황량한 도시  어느 동네에서 흰머리 날리면서 살고 있는가. 목마르게 그리운 얼굴들.



어느 해 고향 집에 돌아와 서니 

반질반질 우리 어머니 손때 묻은 뒤란 장독대

간장독 된장독 사이사이 거미가 사슬로 묶어놓은 요람에 

어머니 손 지문 다 뭉개었네     


구기자 뿌리내린 물 먹으면 

무병장수 한다던 샘터 둘레 생명수 나무는 

우리 부모 수명 연장 못 해 드려 

부모님 잠드신 뒷산 언덕으로 옮겨 갔는가    

 

가을 곡식 말리기에 반듯하고 판판하던 

이백 평 너끈한 샘골 집 앞마당

꽃 좋아하신 아버지께서 벌 나비 모여들라고 예쁜 꽃밭 가꾸셨는데

그 넓은 마당 한 자락이 가시덤불 울타리로 뒤덮여 아프게 찌르고 있네

수년 동안 흙탕물 휘적신 바닥 흉물스러운 얼굴 되니 두발 딛기 안쓰럽네       


조인 가슴 허허로운 마음 다스리고 

눈 들어 하늘 저쪽 바라본다      


아,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 시원한 내 고향 푸른 앞바다가 시야에 들지 않는다

수평선 기다란 가는 선은 가물가물 하늘이 잠식했는가

동공을 키워 보니 똑딱선 떠 있던 바다 멀리에 

허연 방조제가 길게 가로 놓여 있다


대궐같이 기품 있는 우리 큰 기와집

오순도순 살갑게 고락을 함께한 정겨운 내 부모 내 형제 

떠나간 긴 세월 망연자실 보지 못해 눈시울 적시다가 

험상하게 부껴버리고 황폐화시킨 내 고향집 지신地神이여


바다를 댕강 잘라 갈라놓고 해수 막을 쳐 놓아 

수억만 바닷속 생명의 자유를 앗아간 인간의 야비함에 노怒하신 

고향 바다 해신海神이여     


내 고향 석문면 통정리 샘골집 다섯째 딸이 

통한痛恨의 세월 앞에 엎드려 석고대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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