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장소에서 압도된 (나이롱) 불교신자
어느 무료하던 주말, 같이 일하는 피지 연락장교 쿠루에게 동네 한 바퀴 돌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미 피지 부대 작전과장 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로드트립을 떠났다고 했다. 운전병이 고속도로에서 출구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한참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겨우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왕복 7~8시간이 걸린 여정에서 예루살렘에 머문 시간은 겨우 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 다음주 쿠루가 다시 제안했다. "이번 주말엔 같이 예루살렘 가자." 사실 마음속에서 '가도 되나' 싶긴 했지만, 솔직히 부대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호기심이 이겼다. 로켓경보도 뜨고 하긴 했지만, 그 시기 즈음 가자지구 쪽이 다소 정리되기도 했고, 이스라엘군이나 주변 동네 분위기를 보면 이게 전시 상황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했기에 예루살렘은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금요일에 딱 맞춰 예루살렘 로켓 경보가 울린 건 안 비밀. 타이밍 무엇.)
이스라엘의 주말은 금-토요일이고, 유대인 안식일은 토요일.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지만, 대신 도로는 덜 막히고 사람도 적다. 쿠루 말로는 전쟁 전에는 관광객들로 엄청나게 붐벼서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들었는데, 전쟁 후로 관광객이 거의 없는 상태라고도 했다. 결국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 원래는 5시에 출발하려 했으나, 너무 이르다 싶어 6시 30분으로 조정했다.
매일 다니던 카츠린, 타이베리우스를 벗어나 새로운 길로 향하자 묘하게 들뜨고 설레는 기분. 다만 전날 로켓경보도 있었고 해서 쿠루 차에 방탄복과 방탄헬멧을 싣고 갔다. 물론, 로켓이 떨어질 때 방탄복을 입는 게 빠를까 그냥 쉘터로 뛰는 게 빠를까 하는 일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생각도 했지만 말이다.
예루살렘에 이미 여러번 다녀온 쿠루는 단골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다마스쿠스 게이트 바로 앞 경찰서 바로 앞 도로변에 주차하고 (우리나라였으면 이미 견인 각),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게이트를 지나 예루살렘 올드시티로 입성했다.
나는 원래 옛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공간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크로아티아 스플릿, 이탈리아 마테라, 그리스 미코노스, 로도스섬 등 과거의 구조를 유지한 도시들은 항상 감탄을 자아냈다. 예루살렘 역시 마찬가지였다. 3000년 넘는 세월이 녹아든 올드시티는 과거와 현재가 섞인, 숨이 막힐 듯한 공간이었다.
예루살렘의 첫 인상은 종교 그 자체였다. 안식일이라 검은 옷을 입고 많은 자녀들과 함께 이동하는 유대인들, 소총을 들고 도시 곳곳을 지키거나 누군가를 심문하는 이스라엘군 병사들. 매일 같이 IDF와 일하다 보니 긴장은 덜했지만, 여행자 입장이라면 압도당할 만한 분위기였다.
나는 모태신앙이 가톨릭이지만, 중학교는 기독교 계열, 대학은 불교 계열을 나왔고 입대 후 수계를 받은 불교 신자. 사실 중학교 때 종교 선생님 (목사님) 한테 맞아가며 성경공부를 억지로 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성경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나를 압도했다. 종교인이 아니어도 울컥하는 감정이 드는 곳이었다.
쿠루는 기독교 신자라 그런지 꽤 괜찮은 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통곡의 벽(Western Wall), 예수 무덤이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그리고 올리브산까지. 통곡의 벽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기도문을 접어 꽂아 넣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다음에 나도 하나 적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꽂는 소원들은 일년에 두번 모아서 올리브산에 매장한다고 한다.)
벽 옆의 허름하게 만들어진 목재 통로가 동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것도 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전쟁이 겹치기도 했고, 아주 제한적인 시간에만 개방한다고 했다. 통곡의 벽 주변의 지하?처럼 보이는 통로로도 동예루살렘에 갈 수 있었는데, 여기는 무슬림만 통과 가능하다는 문이었다. 종교와 공간이 겹쳐 있는 도시, 예루살렘답게 크고 작은 종파가 나눠 관리하는 성묘교회 내부는 화려하면서도 경건했다.
이어 들른 올리브산(Mount of Olives)에서는 예루살렘 올드시티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좁고 복잡한 길에서 만난 한 무슬림 주민은 구글 맵을 보고 따라가는 우리를 굳이 불러세워 거기로 가면 안된다고 다른 곳을 알려줬는데, 여기가 진짜였다!! 슈크란 하비비~
카메라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장엄했다. 수천 개의 유대인 묘지, 황금돔, 멀리 보이는 골든게이트(닫힌 문)—이곳에선 진짜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나 혼자 온전히 앉아서 예루살렘 올드시티를 얼마고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울려퍼진 아잔은 정말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신비롭고 완벽한 순간이었다.
쿠루는 이 모든 이야기를 조곤조곤 알려줬다. 유대인 묘지가 모두 문을 향한 이유, 골든게이트가 메시아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라는 이야기. 내가 그날 받은 감정은 그야말로 ‘예루살렘 신드롬’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말로만 듣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웨스트뱅크 근처를 지나고, 오랜만에 맥도날드에서 빅맥과 밀크셰이크까지 먹었다. 건강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맛있는 패스트푸드. (허나 어마무시한 가격은, 두명이 세트 두개에 디저트 두개? 해서 5만원 정도 나왔다.)
마지막 일정은 가이사랴 국립공원(Caesarea National Park). 원체 유적이 많은 나라라 그런건지, 아니면 유대인의 나라가 아니어서인지 로마시절의 타일이나 유적들이 (아마도 최소한의 보존만 한 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수천년 전의 타일들이 여기저기 있는 모습은 그닥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원체 잘 지어놔서 그런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원형극장이랑 새로 발굴중이라는 누구였더라.. 암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감옥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 발굴이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는 또하나의 노력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예루살렘은 여기서 제법 멀어서 가기 쉽지만은 않지만 (하물며 다니는 학교도 예루살렘에 있는데 졸업이 다가오는 지금도 학교에 한번도 못가봤다) 언제 가도 압도적이다. 이 이후에도 다른 시리아쪽 참모들이 이스라엘쪽으로 넘어와서 사해와 예루살렘을 1박 2일로 같이 돌아보기도 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종교를 초월해 가슴을 흔드는 곳,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압도되는 공간이다. '예루살렘 신드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예루살렘 신드롬 :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정신병력이 없던 사람에게서 종교를 소재로 한 정신병적 체험이 나타나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참고로 난 이정도까지는 아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