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도 먹어야 지킨다!
다섯 번째 파병이면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밥은 문제다. ‘식사는 생활이고, 생활은 곧 생존이다’는 진리를 이번에도 실감한다. 그래서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수하물 오버차지를 감수하고서라도 한국 음식을 꾸역꾸역 챙겨온다. 돼지고기, 엄마표 김치와 만두, 라면, 고추장, 쌈장, 그리고 무거워도 꼭 챙겨오는 면세점 화요.
사실 돼지고기나 만두 같은 냉동식품은 좀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예전 파키스탄 파병 때 바르셀로나 한인민박 사장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 덕분에 '아 이정도로는 안죽는구나' 깨달았다(휴가때 바르셀로나 한인민박집에 묵었는데, 사장님께서 돼지고기 못먹고 산다고 꽁꽁 얼린 대패삼겹살을 3키로정도 챙겨주셨다 ㅠ.ㅠ). 그래서 지금도 며칠동안 꽁꽁 얼린 돼지고기나 냉동식품을 공수하고 있다. (여름이나 날씨 좋을때는 불가능, 저번 4월 한국 휴가때 플라이두바이에서 내 수하물 다 안가져와서 3일 지나서 찾아왔는데.. 아슬아슬하게 살렸다. ㅠ.ㅠ 김치는 다 터짐..ㅠ.ㅠ)
이스라엘쪽 캠프 도착하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배달의 민족답게(!) 이스라엘 쇼핑몰을 구글 번역 돌려가며 에어프라이어를 구매했다. 나만 쓰기엔 아까워서 숙소 친구들에게도 전파했고, 지금은 숙소의 필수템이 됐다. 지금은 한국음식 (주로 라면이나 과자 같은) 파는 쇼핑몰도 찾아서 가끔 진짜 급할 때 이용하고 있다. (허나 신라면 '하나'에 6처넌 정도?)
유엔에서 MSA를 받는다는 건, 숙소부터 음식까지 모두 자급자족하라는 의미다. 지금 내가 거주하는 이 작고 소중한 숙소 한 칸의 월세는 한화로 약 100만 원. 서울에서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원룸에 살 수 있지 않을까.
식사는 원칙적으로 사먹어야 하는 구조지만 (시리아 본부 인원들은 카자흐스탄이나 인도식당, 카페테리아에서 사먹거나 직접 해먹어야 한다.), 본부 참모야 네 명뿐이다 보니 피지부대나 인도부대나 다 그냥 와서 먹으라고 한다. 나도 한동안 피지부대 식당에서 잘 먹고 다녔지만, 요즘은 그냥 숙소에서 밥을 해먹는 편이다. 시리아 본부의 동료들이 여기 넘어올때 피지부대 밥 조심하라고 했는데, 피지부대의 한끼 양은 정말 어마무시하다. 손도, 덩치도 큰 친구들.. ㅎㅎ
쌀은 Calrose. 미국산인데 우리나라 쌀과 거의 흡사하다. 고기는 주로 닭고기와 소고기 위주인데, 돼지고기는 유대교와 이슬람 율법 상 모두 금지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 구하기 어렵다. (크리스챤들이 사는 지역에선 종종 파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쿠루 덕분에 나사렛에 돼지고기를 파는 가게도 알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고기나 닭고기 위주로 요리를 한다. 문제는 가격이다. 골란고원이 소 키우는 동네라고는 하지만, 소고기 가격은 진심으로 ㅎㄷㄷ하다. 스테이크용 두 덩이에 3-4만 원은 기본. 레스토랑에서 사 먹으면 7-8만 원은 우습다. 해산물은 더 문제, 이스라엘 한쪽 면이 그냥 지중해임에도 일부 생선밖에 먹지를 않아서 홍합이건 새우건 다 수입이다. 한국서 냉동새우 마넌대? 했던거 같은데.. 여긴.. 2-3마넌.. ㅜㅡㅜ 저번에 진짜 큰맘먹고 냉동 게를 사봤는데, 인도산에 1키로였나? 에 4만원 정도 줬다.
술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와인은 종교물자로 분류되어 세금이 없다더니, 실제로 면세점보다 마트가 더 싸다. 제일 싼 맥주는 6팩에 만 이천 원 선, 일반적인 맥주는 2만 원 이상. 와인은 만 원대부터 마실만 한 수준이고, 위스키나 보드카류는 3만 원대부터 괜찮은 제품을 구할 수 있다.
장을 보러 다니는 마트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드루즈 거주 지역인 부카타의 마트는 술은 안 팔지만 삼양라면과 불닭볶음면을 판다. 유대인 마을인 카츠린의 마트는 라면은 없지만 술은 판다. 시간이 넉넉할 땐 미그달의 답바라는 무슬림 계열 마트를 찾는다. 이 근처에서 물건도 많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비싸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요즘 같은 숙소 친구들과 일정 맞춰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는 나사렛 근처에 있는 한국 느낌나는 대형마트 '마르카자'다. 3층 규모의 마르카자에 들어서면 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아직 푸드코트는 시도 못했지만, 언제 한번 도전할 계획이다.
가끔 특별한 날이나 시리아 본부에서 친한 친구들이 방문하면 바비큐 파티를 열기도 하고, 요리 잘하는 동료가 직접 피자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는 생전 해본 적 없던 김밥을 여기 와서 처음 말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김밥 열 줄쯤은 식은 죽 먹기다. 역시 타향살이에서 늘어나는 건 요리 실력이다. 지금까지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역시나 김밥이랑 이찬원 스타일의 닭전.
외로움이 밀려올 때, 힘든 하루 끝에 따뜻한 밥 한 끼가 큰 위로가 된다. 매일의 밥상이야말로 내가 여기에 있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다. 오늘도 쌀을 씻고, 고기를 굽고, 김밥을 마는 이유. 이곳에서도 여전히, 밥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