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이별들

돌아가지 못하는 평화유지군

by Military Nomad

분쟁에서 희생당하는 이들은 비단 민간인들뿐만이 아니다. 평화유지군 또한 다양한 이유로 현지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콩고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처럼 평화유지군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사례는 종종 기사화되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지는 이별들도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내가 직접 겪은 첫 이별은, 임무단에 도착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당시 피지 부대원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있었고, 다음 날 예정되어 있던 국경 개방 스케줄이 이스라엘군의 사정으로 취소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국경은 열렸고, 우리는 부고를 맞이해야 했다.


사망한 이는 캠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피지군 초소에서 근무하던 장병이었다. 나보다 두세 살 많은 남군으로, 듣자 하니 피지에서는 복싱 선수로도 활동했다는, 그 누구도 죽음을 예상하지 못할 친구였다. 아침에 초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시신은 우리 캠프로 옮겨졌다가 피지 부대 군의관과 함께 텔아비브 외곽의 안치실로 이동했다.


늘 웃으며 인사하던 밝은 피지 친구들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나조차도 울컥했다. 다섯 번의 파병을 거치는 동안 실제로 누군가의 죽음을 조치하는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했다.


며칠 후, 본국 송환을 앞두고 추모식이 열렸다. 임무단장과 참모장이 모두 부재 중이었기에, 주둔지에서 한국군, 인도군, 네팔군을 대표해 몇몇이 참석했다. 내가 상상한 안치실은 대형병원의 영안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문래동 뒷골목을 떠올리게 하는 외진 슬레이트 건물이었다. 건물 옆엔 카센터가 있었고, 시설은 많이 열악했다.


피지군 4명이 관을 들고 입장했다. 판자로 만든 관 위에는 UN 베레모와 리본, 계급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남기는 것이 고작 저 세 가지라니, 허무했다. 피지군들은 성가를 부르며 흐느꼈고, 목사의 추모사는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그저 그의 시간이 다 된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도 유한함을 알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내 죽음에는 감흥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나도,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행사가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고, 베레모와 리본을 걷어낸 뒤 나무 관 그대로 안치실로 들어가는 장면은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름이 펜으로 대충 쓰인 관을 보며, 맨몸으로 와서 수의 하나 얻는 인생의 끝자락이란 게 이렇게 허무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로부터 1년쯤 뒤, 시리아 상황은 요동쳤고, 우리 임무단의 부단장이었던 인도 준장이 임무 도중 사망했다. 나는 당시 이집트로 휴가 중이었는데, 추모 메일과 공지들이 쏟아지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분은 정말 독특한 분이었다. 처음 도착해서 사무실에서 인사할 때, 완전히 직설적으로 "이 임무단에서 이스라엘은 네가 있던 인도-파키스탄의 인도와 비슷해"라고 설명해서 웃기기도 하고 '참 솔직하구나!' 싶기도 했다. 평소 인도 부하들에게는 꼬장꼬장해서 다들 불평이 많았지만, 이스라엘군 앞에서만큼은 유일하게 할 말을 하는 분이었다. 회의에서도 이스라엘 측 주장에 당당히 반박하고, 불합리한 요구에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그런 리더십이었다.


특히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시리아 상황이 급변하던 12월 초, 임무단장이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분이 대리를 맡고 있었다. 시리아 본부를 철수시킬 것인가를 놓고 매일 고민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측과 긴급 대피 관련 협조를 이어가면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임무단 전체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더욱 혼란스럽게 진행됐다. SNS에서는 이스라엘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스라엘 측은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공식 대응을 자제했다. 장례 절차도 순탄하지 않았다. 인도 측에서는 자국의 준장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요구했지만, 임무단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다. 영구 송환 과정에서 필요한 각종 서류나 절차, 의전 부분에서 미흡했고, 결국 임무단 본부보다는 인도부대 인원들이 모든 절차를 챙겨야 했다.


평소 부하들에게 엄격했던 분이지만, 막상 돌아가시니 인도 장교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리 평소에 불만이 있어도 우리 장군님인데, 이렇게 대우받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분노했다. 자국의 고위 장성에 대한 예우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유일하게 이스라엘군을 대쪽같이 상대하던 분이었기에 우리 사무실의 인원들은 가끔은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그 분을 존경하는 편이었다. '임무단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다'와 같은.. 자주는 아니지만 마주칠 때마다 그래도 타국의 장교들에게는 유머러스하고 현장에서의 어려움을 들어주려고 하시던 분이었다. 휴가를 가 있긴 했지만, 그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파병지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가족과도 같다. 하지만 언제든 예상치 못한 이별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평화유지군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더욱 아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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