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살라무 알레이쿰

뜻밖의 초대, 또다시 이동

by Military Nomad

“앗살라무 알레이쿰.”

시리아 장군이 나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첫 반응은 솔직히 “왜 나를?” 이었다. 지금은 시리아 과도정부와 우리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예전의 시리아는 북한과 거의 ‘절친’ 수준으로 가까운 사이였고, 나 같은 한국군 장교가 그런 사람을 만나도 괜찮은 건가, 괜히 일이 커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예전에 파키스탄에 있을 때, 북한 대사관 앞을 지나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던 기억도 떠올랐다. 별일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괜히 엮이지는 말자' 싶은, 그런 느낌이랄까.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시리아 측을 담당하던 네팔의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데려가야 하는 입장이지만, 자기도 왠지 의심스럽고 긴장된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마스쿠스의 큰길을 벗어나,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거의 붙여서 주차를 하고, 가정집처럼 생긴 건물 1층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집 같았지만, 그 안은 시리아 연락단장의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모든 시리아 군인들은 모두 사복 차림이었고, 내부는 꽤 잘 정돈된 집무실 분위기였다.


긴장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시리아 장군은 우리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한국군 장교가 처음 들어온 데 대한 단순한 호기심과 환영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원래 시리아 연락단장이 임무단 소속 참모 장교를 직접 부르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들었다.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장군은 나를 보자마자 "드디어 한국 사람이 왔다"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딸들이 케이팝 팬이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최근 10년간 한국인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다마스쿠스 시내에 한국차가 자주 보여서 신기해 했었는데, 그것도 모두 10년도 더 전에 수입한 차들을 계속 고쳐가며 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차량은 제재 때문에 들어올 수 없고, 간혹 부품만 들어오는 정도라고 했다. 장군은 이스라엘 측을 담당하는 내 임무가 얼마나 민감하고 중요한지 명심하라고 당부했고, 시리아 측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어떠한 적대적 행동도 할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당연히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난하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 알았기에, 그 점이 의외였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준비해온 한국 기념 코인을 건넸고, 장군의 딸들에게 전해달라며 마스크팩 몇 장도 함께 전달했다. 별 거 아닌 마스크팩 몇 장 이었지만, 한국 화장품이 인기가 많다며 소중한 것을 받은 것처럼 고마워하던 장군덕에 분위기는 한층 더 따뜻해졌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적 기억으로 남았다.(사진이라도 같이 찍어둘껄.. 작년 12월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뒤로는 그 장군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살아는 있으려나…)


함께 간 네팔 장교는 소령 계급이었는데, 실제로 소령이 맞았는지는 모르겠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이 임무단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실제 계급보다 낮춰서 파견하곤 한다. 대령을 중령으로, 혹은 중령인데 소령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우리는 진급 예정자가 파병을 갈 경우 '직책계급장'이라 해서 진급할 계급을 미리 달 수 있도록 해주니까.


내가 이스라엘 측 연락장교라면, 이 친구는 시리아 측을 담당하는 연락장교였다. 우리 연락부서는 치프(중령), 시니어(소령 내지 중령), 연락장교(소령), 연락장교2(대위) 같은 식으로 위계가 나뉘어 있었는데, 이 네팔 소령은 그 위계질서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나는 지금까지도 계급이나 직책보다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대령을 달고도 역할을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위·소령이지만 둘, 셋 몫을 해내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국가별로 계급을 달기 위한 최저 복무연수나 평가 기준이 다르다. 나보다 경험도 많고 (당연히) 나이도 많은 유럽의 장교들이 대위를 달고 있거나 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나라는 나보다 군생활이나 경험도 적은 어린 친구들이 이미 대령을 달고 있는 경우도 봤다. 그래서 UN 임무단에서는 ‘계급=능력’이라는 도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모두가 계급과 직책과 무관하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네팔 장교는 거의 임무 종료 시점이었고, 들어보니 연락장교2와 꽤 많이 부딪혔다고 한다. 어째 가는 내내 뒷말이 많다 했더니—“아무것도 안 하고 논다”, “할 줄 아는 게 없다”—그렇게 불평을 늘어놓던 상대가 바로 내가 도착했을 때 안내해줬던 체코 출신의 페트라였다.


페트라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대위로, 이쁘장한 외모 덕에 여기저기서 인기도 많았다. 시리아 본부는 연락부서 인원들을 제외하곤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마스나 국경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따금 면세점 부탁도 많이 들어주고 했다고 한다. 임무단 뿐만 아니라 나중에 보니 시리아 연락장교랑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연락업무도 큰 문제없이 하던 친구였다. 이 친구 덕에 체코·아일랜드 친구들과 함께 바베큐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잠시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다들 12월까지는 여기 있을 거라 생각했고, 나 역시 시리아 맥주 한 박스를 사다 놓고 느긋하게 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왓츠앱으로 메시지가 왔다.

“내일 임무단장이 넘어가야 해서 국경 개방이 있을 예정인데, 그때 같이 넘어갈 준비해.”

응…? 갑자기?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국경인지라, 이스라엘 측에서 오라고 하면 무조건 바로 넘어가야 한다며, 급하게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시리아 본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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