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의 늪
영화감독 A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먹자골목들이 늘어선 시내에서 먹자고 했다.
먹자골목은 음식점이 많아서 선택의 즐거움이 있다.그러자 돌아온 대답.
"거기는 번화가라서 힘들겠어요. 술 귀신이 있어서 잡히면 큰일 난다니까요.”
"술 없이 간단한 저녁식사 정도인데. 술 귀신이요? 하하하하하."
나는 귀신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익히 여귀, 도깨비, 좀비 같은 귀신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술 귀신이라니. 처음 듣는, 신선한 귀신이었다.
"네, 잡히면 큰일 납니다. 전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몸입니다. 아예 술 귀신이 없는 한적한 골목 식당에서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번화가는 생동감이 넘치긴 하지만, 밤이 되면 밤의 다크 에너지가 발동한다
감독 A와 식사를 하면서 술 귀신을 멀리하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금주를 하려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는 호흡이 긴 글쓰기라 글을 쓰다가 술을 마시면, 전날에 썼던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려서 절대 입에 대선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한가지 중요한 제보를 했다. 시내 번화가는 술 귀신이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술 귀신에 잡히면 일차 이차 삼차까지 돌아다니게 된다니까요. 술집 골목에서 휘청이는 헤비 드렁커들이 바로 피해자들이지요. 저도 중독 수준에 빠질 뻔 했다니까요, 지금은 간신히 빠져나와서 건강식을 챙겨먹으며 운동하는 걸로 치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말을 남긴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곰곰히 생각했다.
'어쩌면 술 귀신은 실제로 있을지도 몰라.'
명동, 종로, 을지로, 이태원, 홍대 등등. 나는 술집들이 밀집한 번화가를 알고 있다. 21세기 최신 인테리어를 뽐내는 그곳은 하루가 다르게 트렌드가 바뀐다. 매일 찾아다니는 사람들.
술 중독에 빠졌던 몇몇 친우들 얼굴이 떠올랐다.
술 애호가였고, 안주와 어울리는 술을 잘 알았고, 맛을 추구했던 재미있던 사람들. 그들은 수많은 신나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술을 멀리하고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졌다. 오히려 헤어짐은 다행이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선배도 있었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풍경 중 하나 ; 술을 부르는 곳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 의외로 많다. 알콜 중독도 그중의 하나인 셈이다.
감독 A는 뭐에 쓰였던 것 같다고 표현했다.
"한 잔이면 충분히 취할 수 있잖아요, 근데 취했는데도 버릇처럼 술병에 손이 계속 가는 거예요.. 한 잔이면 되는데. 이상한 거예요. 술 마시는 사람들, 거기에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명태조림을 앞에 놓고 코카콜라를 나눠 마시며 감독 A와 알콜 중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중독 현상을 겪게 되는데, 알콜도 그 중의 하나인 셈이다.
게다가 술에 붙여지는 세금은 세다. 소주 한 병당 72%가 세금이다.
알콜 중독자일수록 나라에 내는 징벌적 세금이 무척 많다. 는 사실. 그에 비해 국가에서 알콜 중독자에 대한 치료나 진료와 같은 복지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수많은 중독 중 알콜 중독이 가장 지독해서 인간의 의지로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술은 신선의 음료이다. 인간이 제어하려면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데, 딱 한 잔만 마실게를 외치다 술독에 빠져 실패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중독이란 것이 그렇지요. 중독에 몰입하게 되면 두번 다시 끊을 수 없어요."
감독 A는 인간이 몸부림치 듯 에너지를 열정적으로 쏟으며 알콜 거부 활동을 해야 겨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차 중독이 그나마 바람직한 중독이지 않을까
나는 술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운전대를 잡고 출퇴근하면서 술을 안 마시게 되었다.
술을 마시면 대리운전 비용도 추가되고, 아침에 출근하려면 해독이 안 되서 아픈 머리 부여잡고 부랴부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
다음 날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술을 마시는 시간을 숫자로 환산해보니, 왕복하며 길에서 보내는 시간, 안주를 기다리는 시간, 맛집 앞에 대기하는 시간 등. 최소 4시간을 소모한다.
나는 술 대신에 다른 것들에 중독되기로 했다.
책 읽기에 빠졌다. 누군가 부르기 전까지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다 더 강한 본능에 빠졌다.
잠 귀신의 부름에 순순히 응하다가 잠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시집이 펼쳐진 채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그중 몇 몇 근사한 문장들이 햇볕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근사한 새로운 중독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