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니까 병을 아시나요

아기와 함께하는 첫 외박이란

by 이꺽정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아주는 보부상이었다.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필요할 것 같아서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어느새 등짐처럼 무거워진 가방이 있었고, 그걸 또 사막에서 짐 나르는 낙타처럼 어떻게 이고 지고 다녔다. 이런 내 보부상 새싹은 초등학생 때부터 보였는데, 혹시 중요한 걸 못 챙겼을까 봐, 혹은 열심히 걸어오던 길에 어디에 떨어뜨렸을까 봐 학교 가는 길에 몇 번이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어서 잘 챙겼는지,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보부상 꿈나무였다. 가방을 무겁게 들고 다니면 키가 안 큰다던데, 내가 매고 있는 책가방을 슬쩍 들어보고 깜짝 놀랐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보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은 걱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갈 때, 혹시 옷을 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늘 여벌옷을 넉넉하게 챙기고, 준비물을 챙길 때도 누구 빌려줘야 할 수 있으니까 한 두 개는 더 사보고, 어디서 덜렁대다 넘어질 수 있으니까 연고랑 밴드, 잘 되던 카드가 갑자기 안 찍혀서 버스 못 탈 수도 있으니까 교통카드도 한 장 더, 늘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겼다.



그리고, 이 혹시 모르니까 병은 초보 엄마가 되면서 더 악화되었다. 아기와 함께 하는 외출, 아기와 함께 하는 여행은 챙겨야 할게 정~말 많다고 먼저 엄마가 된 선배들에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필요한 게 많은 작은 인간과 늘 걱정과 가정이 많은 큰 인간이 합쳐지면 엄청난 양의 짐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아기와 조금씩 바깥에 나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위기들을 겪으며, 나의 “혹시 모르니까” 데이터는 더욱 풍부해지고 있다. 지난번에는 혹시 몰라서 챙긴 공갈 젖꼭지가 엄청나게 큰 역할을 했는데, 그 공갈 젖꼭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다음번에는 꼭 여분을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턱받이를 하고 차에 탔는데 차에 타자마자 분유를 게우는 바람에 다음번에는 턱받이도 하나 더 챙겨야겠다고 목록에 추가한다.




처음으로 아기와 우리 집이 아닌 친정집에서 자야 하는 날의 전날밤, 나는 짐을 챙기다 챙기다 이 정도면 그냥 집을 가지고 가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집을 들고 다닐 수 있는 달팽이가 아닐까, 한탄했다. 남편은 조선시대 임금님 행차도 이 정도로 짐을 챙기진 않을 거라고 작은 한숨을 쉬었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이 생겨서 내 덕을 톡톡히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던 탓에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못했다. 묵직한 짐가방 몇 개와 함께 겨우겨우 도착한 친정에서 끝도 없이 비둘기가, 혹은 손수건이 나오는 마술사 모자처럼 이것도, 저것도 꺼내놓자 엄마는 처음에는 기특하다는 표정에서 나중에는 내 딸이지만 정말 징하다라는 표정으로 점점 바뀌었다. 이번에 챙겼던 짐에서 쓰지 않은 게 50% 정도는 될 거라, 다음 여행에서는 짐을 조금 줄일 수 있으려나? 얕은 기대를 가져본다.

아기가 크면 클수록,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넘어질 수 있으니까, 배고플 수 있으니까, 졸릴 수 있으니까, 옷을 버릴 수 있으니까 등등 혹시 모르는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게 벌써부터 두렵다. 아마 이번 생에 나의 이 혹시 모르니까 병을 완치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그 혹시 모르는 상황이 정말 발생했을 때 짜잔 마법사처럼 준비된 물건을 꺼내는 쾌감이 상당해서 오늘도 나는 성실하게 짐을 챙기고, 씩씩하게 이고 지고 다닌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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