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꺽정 Mar 08. 2021

동대문운동장의 추억

희로애락을 함께한 운명적 환승역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피곤한 출근길,

하루의 에너지를 거의 98%는 소진하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지루하고 힘든 퇴근길.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난다.


2,4,5호선 환승역.


대학생 때는 2호선으로 환승하여 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5호선으로 환승하여 회사를 다닌다. 이 정도면 이곳을 나의 운명적 환승게이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재택근무를 하다가 출퇴근이 너무 힘겨워진 나머지 나의 운명적 동반역을 너무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얽혀있는 귀여운 기억들을 몇 개 주섬주섬 꺼내본다.




지금의 동역사라고 불러야 할지, 동역문으로 불러야 할지, 동역공으로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라는 길고 어려운 이름이 되기 전,

이 곳은 동대문 운동장이었다. 그리고 그때 꼬꼬마였던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여러 번 구경을 오곤 했다.

롤러스케이트를 산다거나, 햄스터 친구를 분양받기 위해!


그 시절의 나에게 이 곳은 감자 핫도그의 성지이자,

수박바의 고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졸라서 도깨비방망이처럼 감자튀김이 잔뜩 붙어있는 핫도그를 하나 사서 와구와구 먹고, 다 먹고 나서 한바탕의 쇼핑을 마치고는, 핫도그마냥 나무젓가락에 길게 꽂혀있는 수박을 먹곤 했다.


핫바랑 소시지도 있었지만 내 선택은 언제나 감자 핫도그, 멜론과 파인애플도 있었지만 내 선택은 언제나 수박!


이 곳은 감자 핫도그와 수박에 대한 순애보와 함께한 곳이다.




중학교 때였나, 동갑이었던 친구의 사촌을 따라 그곳에 있는 쇼핑몰에 옷을 구경간적이 있다. 엄마랑 쇼핑 삼아 와서 구경한 적은 많았지만, 코 묻은 돈을 쥐고 친구들과 가본건 처음이었고, 더더군다나 남자 옷을 파는 곳에 가볼 일은 더더욱 없었다.


"친구야. 와서 보고가~"라는 다정한 말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진 때가 있었을까?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잔뜩 풀이 죽어서 걷고 걸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은 어색했던 친구의 사촌 남자애는 어떤 옷가게 한 곳에서 상의에 하의, 외투에 벨트까지 사게 되었고, 그 옷가게 주인님이 현란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얼마나 좋은 가격에 옷을 사는 건지, 자신이 얼마나 양심적인 판매자인지를 그 아이에게 세뇌시키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쨌거나 그 사촌 남자애는 산 옷이 맘에 든다고 했고,

그 애가 좋다니 그것으로 되었었다. 

그치만 살짝 후회가 되고 화가 나기도 했고,

함께 와줘서 고맙다며 우리에게 돈가스까지 사 준 그 사촌 남자애 때문에 아주 조금은 슬퍼졌다.


이 곳은 또 환상적인 계산기 스킬과 거부할 수 없는 판매 스킬로 가득 찬 곳이었다.




대학교 때, 처음으로 인턴 출근하던 날. 비록 인턴이기는 하지만 학생이 아니라 회사원의 신분으로 등교가 아닌 출근을 하는 그 날은 나에게는 매우 특별했다. 


뭔가 훌쩍 어른이 된 기분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 탔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 지옥철 안에서도 이것이 직장인의 라이프라며 뿌듯해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약간 미친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에서 내린 뒤, 파도에 올라탄 것처럼 환승구간을 지날 때 옆에 서있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강제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경험이 너무 신났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약간 콧노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나, 참 밝았구나.


이 곳은 한때 직장인 라이프에 대한 멋진 환상을 가진 기력 넘치는 대학생의 망상으로 가득 찼던 곳이었다.




꼬꼬마의 기쁨과, 중꼬마의 분노와 슬픔, 대꼬마의 환희로 가득 찼던 이 곳은 직꼬마가 된 나의 하루에도 여전히 빼놓을 수 없는 관문 같은 곳이다.


비록, 내 생에 첫 출근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꼭 닮은 출근과 동시에 퇴근하고 싶은 직장인 1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이 길에서 즐겁기도 하고, 화나고 속상하기도 하고, 철없이 신나고 그렇다.


오늘도 이곳을 잘 지나간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나갔다.






작가의 이전글 충실히 계절을 보내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