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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꺽정 Mar 15. 2021

걱정 부자의 생존방법

세계평화와 저녁 메뉴



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범불안장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갑자기 이 엘리베이터가 추락할까 봐 걱정하는 것, 예기치 못한 상황에 겪어본 적 없는 사건이 생길까 봐 불안해한다는 예시와 설명들을 들으며, 나는 거의 황당한 기분까지 겪었다.


다 이러고 사는 거 아니었어?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정말로 상담을 한 번 받아봐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자라온 내 모습을 되돌아봤을 때 나는 그냥 유달리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이르렀다. 누가 나에게 지금 걱정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적어도 50년 후쯤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오늘 저녁 운동을 할까 말까에 대한 걱정까지 족히 1시간은 걱정 얘기만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걱정을 보유한 나.




초등학교에 다니던 삐약이 시절, 나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준비물을 놓고 가면 어쩌지였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에 준비물을 똘똘하게 챙겨가는 것은 내 중요한 책임 중 하나였고, 그래서 나는 학교를 가다가도 몇 번씩이나 가방을 열어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간 약속을 못 지킬까 봐 걱정이 되어서 집에서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출발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갑자기 지하철이 멈출 수도 있고, 그날따라 버스의 배차간격이 엄청나게 길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걱정과 습관은 여전히 유효하여 나는 항상 이르게 집을 나선다.


회사에서 인쇄나 제작을 담당했을 때는 그 걱정이 극대화되었다. 몇만 부나 되는 수량을 제작하는데,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 탈자가 있는 상황을 걱정하는 건 정말 최악이었다. 오죽하면 밤에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다가, 번뜩 떠오른 어떤 페이지의 어떤 글자 하나를 확인하려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곤 했다.


여행에 가면 가려고 했던 음식점이 문을 닫았을까 봐 걱정되어서 꼭 근처에 플랜 비정도는 찾아두고, 정처를 모르고 헤맬까 걱정되어 꼼꼼하게 계획을 짜둔다.


걱정 부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확인과 계획이 필수다. 확인과 계획이 없이는 그 걱정이 불안으로 번지게 된다. 내 거듭된 확인과 계획에 대한 확신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꽁꽁 동여매면 더 이상 걱정이 날뛰지 못하게 된다.




피어싱을 뚫기로 작정을 하고 친구와 함께 패기롭게 나서는 길. 아프면 어쩌지, 뚫다가 잘못되면 어쩌지, 뚫고 나서 곪으면 어쩌지, 온갖 할 수 있는 걱정을 모아 모아 늘어놓는 나를 보며 친구는 꿋꿋하게 인내심을 지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엄청난 걱정을 늘어놓으며 잔뜩 겁을 먹고 피어싱 가게에 들어선 나는 결국 "못하겠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후다닥 도망쳤다. 그리고 도망치는 내 뒤를 따라 나온 친구에게 매우 합리적으로 혼쭐이 났다.


그만큼 걱정을 하고 갔으면 뚫던가,

안 뚫을 거였으면 걱정을 하지 말던가!

실컷 걱정만 하고 안 뚫는 건 뭐야?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가서 뚫었다.

그리고 내 걱정 중 어떤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예쁘게 반짝이는 피어싱을 보니 걱정을 멈추고 용기를 내길 잘했다 싶었다. 그 날, 혼자 갔다면 나는 걱정을 고대로 안고 돌아왔겠지.


걱정 부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걱정도 팔자라며 무섭게 일갈하는 주변인이 옵션이다. 걱정의 땅굴은 끝이 없어서 파려면 계~속 팔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파고 들어가는 삽을 빼앗아서 멀찍이 패대기 쳐줄 수 있는, 열심히 판 땅굴로 등을 떠밀어주는 주변인이 필요할 때도 있다. 가족이건, 친구건, 연인이건, 혹은 우연히 마주한 글이건, 상황이건!





걱정 부자로 사는 건 정말 녹록지 않은 일이다.

나는 지금도 세계평화와 나의 저녁 메뉴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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