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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꺽정 Apr 29. 2021

김밥을 좋아합니다

잔혹한 김밥 킬러의 잔잔한 행복



어렸을 때, 소풍 전날이면 항상 신이 났다.


엄마와 마트에 가서 과자 몇 개와 음료수를 사고, 김밥 재료를 장바구니에 착착 담을 때의 그 기쁨이란! 집에 돌아와서 음료수는 냉동실에 얼려두고, 과자는 가방에 미리 넣어두고 설레며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소풍 전날에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고,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엄마가 주방에서 돌돌 말고 있는 김밥.

참기름 냄새는 솔솔, 커다란 쟁반에 한줄한줄 차곡차곡 쌓였다. 자르다가 더러 옆구리가 터지는 녀석이 있으면 쏙쏙 입에 넣기 바빴다.


엄마는 가장 예쁘게 생긴 것들만 골라서 도시락통에 담아주셨다. 워킹맘인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해 준 도시락은 그렇게나 맛있었고, 이제야 그렇게나 고맙다.


아무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는 김밥이다.





이제는 스스로 김밥도 잘 쌀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 김밥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내 김밥도 나름대로 맛이 좋아서 친구들과 피크닉을 갈 때면 단골 메뉴가 되었다.


평소에는 좋아하지 않는 시금치와 우엉은 김밥에는 빠질세라 더 넣고, 김밥에 생당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얇게 채를 썰어서 살짝 소금을 두르고 달큼하게 볶아서 잔뜩 넣는다. 계란지단을 부치는 솜씨는 형편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부쳐서 길쭉하게 잘라 2-3개씩 넣는 것으로 못생김을 무마하곤 한다.


참치를 잔뜩 넣는다거나, 볶은 김치를 넣는다거나 엄마 김밥보다 내 김밥은 훨씬 도전적이다.

손이 많이 가지만, 꼭 먹고 싶어 지는 때가 있어서 때로 혼자서 장을 보러 가도 김밥 재료를 주섬주섬 사 온다.


그리고, 몇 줄씩 만들어서 아침에도 먹고, 점심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고 양껏 맘껏 먹어댄다. 잔혹한 김밥 킬러,






얼마 전에는 엄마에게 지나는 말로 김밥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이렇게 선물처럼 엄마 김밥이 도착했다. 동생 라이더스가 배달해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


통에 가득 차게 담겨있는 김밥을 보면서 새삼스레 엄마의 사랑에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는 나 혼자 먹을걸 알지만 그래도 4줄이 모자랄까 싶어서 이렇게 꽉 채워서 넣은 걸까,


엄마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자비라고는 없는 김밥 킬러였던 게 확실한 것 같다. 라면이나 비빔면을 하나 끓여서 함께 먹을까 하다가, 면을 함께 먹으면 엄마 김밥을 넣을 공간이 줄어드니까 꿋꿋하게 김밥만 열심히 먹었다.


그래도 정말 언제나 흠없이 맛있다!

소풍의 설렘은 느끼기 어려운 어른이 되었지만, 김밥과 함께라면 그때의 잔잔한 행복이 언제나 차오른다.


아무래도 내일 점심으로는 회사 앞 김밥집에서 김밥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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