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의 전환이 자산이 되다
얼결에 건넌 일본,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처음엔 4~5년쯤 살다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준비도 없이 와버린 게,
오히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유가 된 것 같다.
일본에 온 얼마 후, 구청에 신고를 하러 갔다.
번호표를 뽑아 들고 앉아 있었는데,
스피커에선 알 수 없는 일본어가 흘러나오고,
전광판에는 내가 쥐고 있던 번호가 번쩍였다.
순간 당황해 손에 땀이 차올랐다.
불려도 못 일어나는, 발이 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전광판만 바라보는 나.
겁쟁이였던 내 마음과 머리에서 말한다.
“앞으로 여기서 이렇게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나?”
막연한 두려움은 단숨에 공포가 되었다.
그 당시 가장 부러웠던 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스텝들이었다.
“고객님, 그 말 이해 못 했어요.”
그러면 고객이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해 주고,
대화가 이어졌다.
그게 나에겐 멀게만 보이는 세계 같았지만,
우선. 넘어야 하는 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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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성인으로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나는 혼자 힘으로 삶을 헤쳐온 어른은 아니었다.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데는 늘 서툴렀다.
그래서 언니가 내게 붙여준 별명은 “오리무중.”
뭔가 말은 하는데 결국은 알 수 없는 사람.
그러다 마흔을 앞두고, 처음으로 외국살이를 시작했다.
나는 결심했다.
이판사판, 이제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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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회사의 책임자로 업무를 맡았을 때,
제일 무서웠던 건 ‘문서 사기’였다.
계약서를 며칠째 끼고 보며 공부했지만,
솔직히 한글로 되어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애써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나 이거 몰라요. 다시 알려주세요.”
그리고 늘 확인하며 살았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다시 묻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혹시 무시당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예전에 내려놓았다.
웬만한 건 더듬더듬 직접 찾아내 해결하는데 익숙해졌다.
얼마 전 법무국에서 변경신청을 할 때도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한자도 모르는데, 이제는 노안까지 와서요~”
그러자 직원들이 하나같이 친절히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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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일본 생활 가장 큰 위기였던 카드부도 사건.
그때 내가 얻은 자산은 돈이 아니었다.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적극적으로 도와달라 하면 기꺼이 돕는다.
누구나 타인을 돕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 내 조직생활 경험은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차별을 겪지 않았다.
어쩌면 “모른다, 도와달라”를 솔직히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나는 여러 귀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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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투명하다” 혹은 “천진하다”는 말을 듣는다.
한국 지인들을 만나면 빠지지 않고 이런 말이 나온다.
“일본 가서 더 잘 풀린 것 같아.”
“얼굴이 더 좋아졌다.”
그 말이 맞다.
형편도 나아졌고,
무엇보다 살기가 편해졌다.
가끔 생각한다.
한국에서 살 때도 모르면 “모른다” 하고,
“도와주세요, 챙겨주세요”라고 당당히 말했다면
내 삶은 더 일찍 편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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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동네 야채가게에 간다.
사장님이 농가에서 직접 가져온 계절 채소가 늘 놓여 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채소를 보며 물었다.
“사장님, 이거 어떻게 해서 먹어요?”
사장님이 신이 나서 설명해 주시는 동안,
옆에 있던 또래 아주머니가 깔깔 웃었다.
“아이고, 속 시원해! 나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물어볼 생각을 못 했네.
옆에서 들으니 바로 기억났네~”
그 순간,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꺼내며 웃음을 나눴다.
나는 뭔가~왠지 뿌듯했다.^^
모른다 말할 용기, 도와달라 말할 용기.
그 두 마디가
내 일본살이를 , 내 인생을 지탱해 주는 진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