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의식은 지금 어디에 힘을 쓰고 있는가?”
심미안(審美眼), 즉 아름다움을 보는 눈.
그걸 확인하고 싶어 떠난 시마네현 여행길에서
나는 뜻밖에도 내 무의식을 먼저 마주했다.
여행 내내 나를 파고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내 무의식은 지금 어디에 힘을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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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내가 스위치를 켤 때만 작동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늘 깔려 있는 저류처럼 흐른다.
나는 그 에너지를 내 단점, 결핍을 보완하는 데에
너무 많은 용기와 힘을 소모해 왔다.
굳이 그늘을 들여다보며 나 자신과 싸우는 데에.
그건 세상의 진화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내 행복의 진화에는 방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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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모순
나는 오래 착각했다.
결핍을 메워야 더 나아진다고.
모순을 지워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제 안다.
결핍은 메워도 또 다른 구멍이 생기고,
모순은 안고 가야 비로소 ‘나다움’이 된다.
중요한 건 단점을 줄이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어디에 심느냐는 것이다.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 되고 있는 흐름”에 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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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과 환경
헤밍웨이 집안에서 자살이 이어졌듯,
선천적 유전은 무겁게 작동한다.
나 역시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가족이 네 단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는
말을 항시 들어가며
늘 결핍부터 보는 습관이 몸에 새겨졌다.
그건 내 무의식의 코드였다.
단점을 감추려는 무의식이
오히려 나를 그늘 속에 묶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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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속에 젖은 채 일상을 보면,
나는 결국 내게 열려 있는 행복을 놓치고 만다.
투자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이미 -50% 손실 중인 종목은
+100%가 나야 겨우 회복된다.
하지만 이미 수익 중인 종목은
평균회귀의 안정성을 지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높아진다.
그러니 단점 보완에 에너지를 몰빵 하기보다,
장점에 무의식을 두어 여유를 확보하는 게 현명하다.
이제 나는 이렇게 정한다.
내 무의식을 결핍이 아니라 자기 신뢰에 두자.
“나는 이미 잘하고 있다”라는 흐름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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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심미안이란,
“무엇을 아름답다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다.
그걸 알아가기에도 인생은 벅차다.
내가 못난 부분에 무의식을 빼앗기느라
아름다움을 볼 시간을 잃는 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어차피 우연히 주어진 인생,
물론 소중하지만 손해라 해봤자 그리 대수일까?
그리고 기대라 해봤자,
지금 내가 살아내는 순간보다 더 클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보는 창은 언제나 거울이다.
그 거울을 닦는 일은
곧 내 무의식의 창틀을 닦는 일이다.
먼저 깨끗하게 닦인 거울 속에서 웃어 보일 때,
비로소 내 얼굴과 내 삶에
한결같은 빛이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