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도망친 거야

by miel




# 길을 잃었습니다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하며 혼란스러움을 잠재울 수가 없다.

너무 힘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친 거야. 도망친 거. 도망친 거 맞잖아.

이 말이 계속 나를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 뇌리의 한쪽에서 계속 속삭이고 있다.

자 좋다. 나 또한 합리화하기 싫다.

내가 잘못을 했다면 잘못을 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합리화에 묶여버려서 그 관점에 한해서는 글이 왜곡되어 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투명한 짓이다. 사람들에게 나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선의건 악이건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영원히 기록될 글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난 더 이상 글을 이제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한다. 글은 진실성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갖는 것이지, 위선을 기반으로 작성한 글은 진짜 내 글이 아니며 급기야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거라는 막연한 짐작도 든다.


# 나의 죄책감의 원천



나의 죄책감의 원천은 고등학교 1층에 자재실이었다. 학생과장님은 대자보가 붙은 다음날 나를 불렀고 극도의 공포감으로 대자보는 내가 썼으며 조직의 일원이 누구인지를 모두 말하였다. 그날로 취업을 명목으로 학교에서 나와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무기정학이 되었다. 그 친구들은 무기정학과 퇴학이 처리되었다고 들었다. 나의 십 년 정도의 운동권 생활은 그 죄책감이 원천이 되었다.

친구들에게 미안함, 사립학교의 비리를 알아버린 순간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민주화운동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고 했다가 내 성향과 맞지 않아 진보정당으로 들어가 활동을 하였다.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지만, 감성주의적 성향과 진보적인 성향은 늘 이 세상 속에서 겉도는 이방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혼란과 방황 속에서 작은 실패를 하면서 나의 열등감은 극을 달했다. 나의 삶을 살수록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고 모든 것에서 실패를 찍고 나왔다. 할 수 있는 것은 나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결론뿐이었다. 내가 너무 끔찍하고 싫었다. 고의적 죽음의 유혹이 너무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타지에 고시원에서 9층에서 낙하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때 나를 살게 했던 것은 기도였다. 누군가 저를 보고 계시다면 저의 이 흐트러져 버린 인생을 구원해주시라고 빌었고, 매일매일 울면서 교회당을 다녔다.


늘 선하게 살고자 했지만 결국 악이 되어 버렸던 나의 삶에 대하여, 신은 성직자를 통하여 내 마음속을 헤집으시고 모든 눈물을 쏟게 하셨다. 네가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놓지 않겠다고 말이다.


# 소울메이트과 멘토



오늘 나는 소울메이트와 멘토를 만나고 왔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을 감당치 못하고 못하고 도망친 느낌이 맞는 것인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문제를 이제는 알아야 했다. 변할 수 있는 것인지...

혼자 생각해오던 그 죄책감의 실체를 이제는 알아야 했다.

삼십 년간 나를 옭아매고 있는 그 우물을 자신에게 소명해야 했다.


소울메이트는 기쁨이 없으면 그 일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힘들지만 기쁨이 있는 가였다. 대부분의 시간이 기쁨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인 성직자님은 나를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라며 사례를 말씀해주셨다.

선교사가 몇 개월 만에 선교지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고,

몇 개월 만에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요셉 역시 모든 삶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형들에 의해 팔렸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고,

결국엔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열두 사도들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모두 도망갔지만 결국 그로 인해 전 세계로 복음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선한 마음으로 행하면 누군가의 악조차 선이 된다는 것이다.


# 선을 위해 노력하였는가



결국 내 마음의 중심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그곳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의 미래의 성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 인성을 교육하였고, 심각한 부분은 각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근무조건과 인간관계와 아이들을 성향을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살 수는 없는 너무 예민한 사람이었다.


멘토는 내게 최선을 다하여 선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했다면 죄책감은 갖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새로운 곳의 열심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열등감은 또 다른 우월감을 부른다.

열등감을 없애고자 우월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다. 둘은 단짝이다. 나는 나의 열심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인생 내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네가 선하고자 노력하지만 나는 결국 성향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개인주의자가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지, 선한 자가 선하게 사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것이다.


빗속을 운전하며 오는 길에 나는 가슴속에서 뭔가 큰 울림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고뇌하지만 살아있어 느끼는 감성의 극치 같은 깊은 곳의 희열이었다. 요즘 자주 느끼는 행복감이다. 내 인생의 죄책감을 조금 비운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도 나의 마음의 죄책감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아있는 죄책감은 선하게 살도록 노력하게 하는 안전장치가 된 듯도 하다.


내 인생이 연속적인 실패의 도미노 현상이었지만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그로 인해 성장해왔고, 이젠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앞으로도 부족한 사람 일 것이고, 역시 계속하여 크고 작은 실패가 반복될 것이다.그렇다고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의기소침할 수는 없다. 이젠 그냥 툭툭 털고 나가야겠다.

달라진 것은 메타인지를 더욱 견고하게 형성하여 조금이라도 어리석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무조건 선한 길이 아니라, 나의 성향 속에서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난 별수없이 작가 해야 되구나.

이게 최선이었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 이상의 생각의 선은 넘지 않을 것이다.

답을 알 수가 없으므로 그 이상의 생각은 내 영역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