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결핍증과 성향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감성적 성향이었던 내가 짝을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노력했던 시간은 고등학교 1학년 첫사랑을 만나던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을 더욱 추구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의 실체는 같은 생각을 하고 나만을 사랑해 주고 대화를 통하여 서로가 성장하는 관계를 원하였고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오며 나의 환경 속에서는 그런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환상에 가까운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왔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각일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존재는 상대의 성격과 인격과 다른 개념의 차원이었다. 상대의 성격과 가치관을 떠나 나를 사랑해주거나 비슷한 성향을 보인 사람을 만나면 타인이라는 생각보다 친근하고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공감과 함께 안쓰러움이 느껴졌었고 그것이 마음의 빗장을 더 가볍게 열어주고는 하였다.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의 의미일까도 싶다.
지금의 이상형은 나처럼 애정 결핍증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평안하고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혼했거나 혹은 일찍 한 부모만 존재했다거나,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거나 그러한 사람이다. 애정에 대한 결핍을 느끼지 못한 모난곳 없이 자라난 사람은 상처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경험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은 오히려 맞지 않았거나 마음이 가지 않았다. 상대는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모난곳 없는 사람들은 애정 결핍증을 가진 사람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경험해보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데 이성은 서로가 애정을 주면서 받기 때문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사랑을 더 크게 만들기도 했다. 애정결핍은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랑의 크기가 더 클 뿐이다. 애정결핍은 사랑을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하고 집중한다. 소유하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동성은 서로 간의 애정 결핍증을 가진 존재가 만나게 되면 맞지 않았다. 서로가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정결핍은 인간관계를 조금 더 힘들어 한다. 그러나 단점을 극복하면 더 향기롭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된다.
넓게 생각하면 누구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고 내 입장을 이해받고 싶어 하며 누구나 항상 있는 적당한 상처들을 치유하고 싶어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랑을 주기 보다 받기를 원하기에 관계는 평행선을 달리며 반가운 인사와 따뜻한 안부가 인간관계에 80%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많은 부분의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고민과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의 주 내용이고 그러한 부정적인 말들은 세 번 이상을 듣게 되면 위로를 해주고자 하는 선의의 에너지가 어느정도 사라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전달되어 자신에게도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오므로 불평과 불만을 듣기 힘들어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의견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것이 합일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인간의 생각은 각자 다르게 존재하며 자신의 성향과 살아온 환경에 따라 상황에 대하여 다르게 반응하게 되므로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래서 사회는 홀로 부르는 독창이 아니라 다 같이 화음을 내는 합창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다.
기형도 시인은 고등학교 문학동아리에서 알게 된 시인이었는데 그때도 이 시인의 시가 어떤 시보다 이해 되었고 가장 현실적이며 솔직한 시라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가끔 이 시를 부끄러움처럼 기억 해내곤 했는데 최근 다시 이 시가 떠올랐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입 속의 검은 잎>(1989) - 기형도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기로 했을 때 떠오른 시였다. 기형도 시인도 아마 나의 이런 마음을 느꼈을까. 아니 어쩌면 대다수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 속에서, 결국 자신을 사랑했을 때 인생의 많은 부분인 타인과의 관계가 질서가 생겨나고 자리를 잡고 다른 사람을 이해가고 사랑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흔히 하는 실수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너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여, 상대의 생각을 내 생각과 맞추려 하는 합일 하고자 하는 본능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정의라는 것이 인간관계 있어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정의는 인생이 자기 삶 속에서 깨우치게 되는 영역이다. 다른 사람의 다른을 합일하려는 시도는 정의감 때문이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기준인데 인간이 관계 속에 옳고 그름을 가릴 수는 없다고 생각되게 되었다. 내가 옳았다고 하더라도 타인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그 상황에 그 시점에 그 사람의 성향에는 어쩔 수 없는 때이자 한계였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니 내가 틀렸을 수 있는 것을 정의의 잣대로 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법적 관계와 정치의 영역에 필요한 사회적 용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으며 인간에게 사랑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상처는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말했듯이 사랑을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존재이며 사랑을 받고만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경쟁하고 상처받은 자신을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만이 인간관계에 필요한 말이 아닌가를 생각한다. 사랑하기 힘든 타인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한 인사가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평가와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상처에 상처를 더하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랑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위한 과정이다. 얼마 전 불합리하다고 사안에 대하여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신중하고 신중해지려고 노력하였다. 그 고민이 아마도 반년은 지난 것 같다. 그리고 결국 대안을 찾았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 속에서 헤아리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도 역시 사랑을 원하며 인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주기보다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단지 나는 아무도 사랑을 주지 않으려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신적 영적인 사랑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친절하기를 좀 따뜻하기를 좀 더 사랑하기를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고민과 방황을 하여도 결론은 나의 삶 속에서나마 가장 최선이기를.
그리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한명이라도 더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서로 나누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가족을 만나기를 기도한다.